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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박스종이에 또박또박 써놓은 글.
ⓒ 박인선
미국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8월9일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 왕은 8월15일 방송을 통하여 일본의 항복을 알리게 된다.

1945년 8월15일. 당시 어머니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에 들어온 지 2년이 조금 지났었다. 어머니 나이 12세, 아직도 일본의 지배 하에서 일본말로 공부를 하던 때였다. 이때만 해도 우리말을 못해도 어려움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우리말의 절실함도 나라를 빼앗긴 조국의 현실도 알 바 아니었다. 우리말을 잘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더불어 학교에서는 다시 우리말과 글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뜻하지 않은 고통이 찾아들었다. 아니, 어쩌면 예고된 상황이었다. 우리말과 글로 하는 수업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는 이방인 '조센진'으로 해방 한국에서는 우리말과 글도 모르는 또 다른 이방인이 된 셈이었다. 어머니 유년의 시절은 우리 근대사만큼이나 질곡,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더 이상 학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자퇴를 하게 되었다.

빼앗긴 우리글과 우리말을 찾고 국권이 회복되어 쓰라린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어머니 같은 '이방인'에 대한 배려는 있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학교를 못 가는 것은 큰 상처였다.

아마도 일본 강점기에 우리말과 우리글을 못쓰게 하는데도 집에서는 대부분이 우리말을 몰래 사용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해방과 더불어 우리말을 쓰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우리 민족의 막힌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과 글을 쓰다가 일본 순사들에게 잡혀 들어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숱한 사람들이 고초를 당했던 우리말과 글, 이제 마음껏 쓸 수가 있게 되었으니 일본 식민지에서의 해방은 '광복'이란 말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학교를 자퇴하는 것으로 우리말을 모르는 괄시를 톡톡히 받은 셈이었다. 우리말을 모르는 한국의 이방인, 더 이상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로는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 부득이 자퇴를 선택해야 하는 가련한 신세, 어린 마음에 갑작스레 찾아온 장벽은 그 높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학교를 가는 아이들을 멍청하게 바라보면서 가슴을 조아렸던 시간이 얼마간 흐르고 주위의 권유로 한글야학을 다녔다. 어두운 밤길은 혼자 다니기가 무서워 큰 이모도 함께 다녔다. 우리말이 서툴기는 큰 이모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
"가. 기. 구, 게, 고, 나, 니, 누...... ."

▲ 어린시절 우리말과 글을 몰랐던 나의 어머니
ⓒ 박인선
어머니는 야학에서 일본말로 토를 달고 말과 글을 배워갔다. 호롱불 밑에서 야학공부를 하기 위해 십리 밖에서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해방과 함께 우리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뜻있는 사람들에 의한 문맹퇴치운동인 셈이었다. 이런 야학들은 곳곳에 세워져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줄기 희망이 되었다.

그러니 한글야학은 어머니에게 한국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탈출구가 되기에 충분했다. 어머니의 노력은 물론 가족들의 협조도 헌신적이었다. 어머니의 숙부께서는 일본말을 섞어 쓰면 '주먹 군밤이 한 대', 순우리말만 쓰면 '구운밤이 한 알' 이렇게 해서 모두가 우리말과 우리 글을 터득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하게 되었다.

종이가 귀해 비료부대종이를 잘라 노트를 만들고 신문지 위에 몽당연필로 쓰고 또 썼다. 비료부대 종이에 쓰고 지우개로 지우고 또 쓰기를 반복해 가면서, 벙어리나 다름없는 우리말을 모르던 이방인은 서서히 벙어리와 까막눈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는 1945년 12월 31일 우리말과 글에 대한 한글야학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어린 가슴에 응어리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우리말과 글을 또박또박 읽어내고 씀으로써 어머니는 완전한 한국사람이 된 것이다.

어머니는 이 땅에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를 얻은 셈이었다. 우리말과 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았다. 1945년 8월15일 광복절의 의미도 중요하겠지만, 어머니에게는 한글야학과정을 마친 1945년 12월 31일이야말로 제2의 광복이었다.

광복 직후 우리나라 문맹률이 80%였다는 사실에 비추면 어머니의 문맹탈출기는 사뭇 나의 삶에 또 다른 자극이 되곤 한다. 어머니의 말 속에는 전라도의 끈적끈적한 사투리 외에 흔히 쓰는 일상에서 나오는 일본말조차 찾아 볼 수가 없다. 어쩌면 일본말에 대한 남다른 추억이 어머니의 입에서 일본말을 영원히 추방했는지도 모른다.

광복60주년을 맞이했다. 이국만리에서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광복군과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받들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잘 가꾸는 일만이 후손에게 건강한 나라를 물려주는 참된 길이라 생각하면서 세계 속의 모범적인 나라로 우뚝 서기를, 그래서 자랑스런 민족이기를 염원한다.

덧붙이는 글 | '우리가족과 8.15' 기사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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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에서 8년, 예술작업공간을 만들고, 버려진폐기물로 작업을하는 철조각가.별것아닌것에서 별것을 찾아보려는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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