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이기원
그런데 신기하게도 알뜰살뜰 보살피는 벼보다 항상 손가락 한 마디 정도는 더 크게 자라는 게 피였습니다. 맨발로 논에 들어가 벼 포기 사이에 끼어 자라는 피를 뽑다 보면 얼마나 단단하고 질기게 뿌리를 내렸는지를 실감합니다.

벼 포기 헤치고 골라낸 피 줄기를 손에 잡고 안간힘을 다해 잡아당기고 또 잡아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던 피 때문에 온몸에 힘이 빠져버리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뿌리가 아닌 줄기가 두둑 끊어지기라도 하면 피 줄기 손에 잡고 첨벙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습니다. 논물에 엉덩이까지 모두 적신 채 엉거주춤 일어서는 아들을 보며 오랜 세월 논에 삶을 묻고 살아오신 아버지는 껄껄 웃으셨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한나절 논에서 씨름하다 논두렁으로 나와 서면 아버지가 뽑아 던진 피가 허연 줄기 다 드러낸 채 줄줄이 누워 있었습니다. 용쓰고 애쓰며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던 얄미운 피였기에 줄줄이 누워 있던 녀석들을 사정없이 밟으며 집으로 갔습니다.

쓸모없는 잡초라고 수난을 당하는 피도 곡식 대접을 받으며 살던 때도 있었습니다. 신석기 시대 재배했던 곡식이 조, 피, 수수라고 하니 청동기 시대 이르러서야 곡식 대접을 받았던 벼에게는 까마득한 선배입니다.

ⓒ 이기원
하지만 지금은 쓸모없는 잡초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다정한 손길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넘치도록 사랑받고 자라는 벼보다 늘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먼저 자랍니다.

인간들이 잡초라고 비하하지만 피는 스스로 잡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싹 틔우고 때가 되면 열매 맺는 수많은 들풀들 중의 하나입니다. 남보다 더 많은 걸 가지기 위해 욕심 부리고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기 위해 애쓰며 살지 않습니다.

피죽도 겨우 먹으며 살던 시절의 어려움은 까맣게 잊고 사는 인간들의 탐욕을 향해 한마디 던져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니들이 피 맛을 알아?"

그 어렵던 시절, 끈끈했던 정으로 서로의 허기를 채워주며 살던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