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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31일 화야산 계곡
2005년 7월 31일 화야산 계곡 ⓒ 김선호
청평대교를 건넜다. 강 건너편에 파도치듯 이어진 산들이 보였다. 그 산들 중 하나를 오를 예정이었다. '뾰루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 해발 709m. 산은 산이되 유난히 뾰족한 봉우리를 가졌으므로 이 산은 ○○산, 이 아닌 '뾰루봉'이 된 모양이었다.

차를 큰골이라는 동네에 세워 두었다. 이번엔 좀 색다르게 산행을 할 예정이었다. 산을 오르고 다시 오른 길을 되짚어 내려와 차를 세워둔 곳으로 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산행 방식이었다. 이번엔 차를 세워둔 큰골에서 산행을 한 다음에 뾰루봉 입구로 내려올 예정이었다.

큰골에 들어서니 완연한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다. 산 아래 제법 넓은 평야지대를 이룬 논배미에서 초록 물결을 이룬 벼들이 풍요로움을 전해주고 논가에 있는 호박덩굴은 잘 자라 더러는 열매를 매달고 더러는 아직 꽃을 피운 채 여름을 익히고 있었다.

찻길이 나 있었고 산 입구 쪽에 주차장이 있었지만 일부러 차를 아래쪽에 세워 놓고 시골길을 걸어 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볼 만 한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호박꽃과 반딧불이 얘기도 들려주고 노란콩꽃이 얼마나 예쁜지도 보여주고 예전엔 나도 몰랐던 가지가 피운 보라색 꽃도 함께 감상하며 시골길을 걸었다.

간간히 느티나무 아래 놓인 평상에서 부채를 부치며 더위를 식히고 계시는 촌로들이 있는 시골 정경이 참으로 정답게 느껴졌다.

산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매미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가 우렁차다. 아침 일찍부터 물가에는 자리를 펴고 앉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산이 좋아 물도 좋은 곳, 이런 곳에 이런 별천지가 있었구나 싶었다. 차고 맑은 물을 풍성하게 흘려보내는 계곡은 꽤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산 아래쪽 계곡엔 어김없이 가족단위의 물놀이 피서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위로 올라 갈수록 사람이 드물다.

비로소 숲엔 정적이 깃들고 산 속의 작은 암자 '운곡암' 즈음엔 아예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듯 고요하기 까지 했다. 운곡암, 지금은 옛 모습을 하나도 간직하지 못했지만 이 절의 창건연대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지나가는 목마른 길손들 맘껏 목을 축이라고 절 앞에 약수가 콸콸 흘렀다. 약수를 한 사발 들이키며 돌아보니 암자 여기저기 봉숭아가 만발했다. 봉숭아꽃이 피어 있고 장독대가 고즈넉하게 들어 앉아 있는 모습은 이곳이 절이라기보다 어쩐지 여염집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을 재촉해 절을 돌아 산길을 가다 산신각 정도 되는 절 옆 커다란 바위에 핀 꽃에 눈길을 사로잡힌다. 나리꽃 두 송이, 아득한 절벽 바위위에서 자라는 주홍빛 저 꽃송이는 어쩌자고 그리 높은 곳에서 꽃을 피웠는지… 비상하고 싶은 꿈이라도 지녔는지….

2005년7월31일 작은 절집의 작은풍경과 아무렇게나 놓아둔 듯한 범종
2005년7월31일 작은 절집의 작은풍경과 아무렇게나 놓아둔 듯한 범종 ⓒ 김선호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속, 계곡물은 여전히 힘차게 흘러가고 징검돌을 지나 계곡을 건너곤 하는 평화로운 길이다.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 아이들과 노래를 흥얼거렸다. 계곡의 징검돌을 건너며….

계곡도 끝나고 화야산과 뾰루봉이 갈라지는 갈림길, 그곳에 묘하게도 인가가 하나 있다. 뾰루봉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보면서도 인가 쪽에 대고 물어 보았다. "뾰루봉 가는 길이 맞나요?"

"예, 그리로 올라가세요." 비탈진 산길이 만만찮아 보인다. 벌써부터 딸아이는 힘들다고 하고 아들 녀석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앞장을 섰다. 사람들이 별로 지나다니지 않았는지 좁은 산길에 풀들이 우북하다. 특이하게도 산길 초입에 양쪽으로 풀들만 무성했다. 나무는 저만치서 저희들 끼리 몰려 있고 메밀꽃도 아니고 고마리도 아닌 것 같은 풀들이 발길에 채일 정도로 그득했다. 이런 산 또 첨이다. 아득한 벼랑길 같은 비탈길을 오르고 올라도 어디 한군데 편안하게 쉴 만한 공간이 없는 길을 '좀 쉬었다 가요'하는 딸아이를 달래 가며 오르고 올랐다.

그렇게 7부 능선 즈음까지 쉼 없이 올라 서 보니 평원지대 같은 넓고 평평한 등성이가 나타났다. 등성이를 올라서니 아래쪽 아득한 벼랑 같은 산속에서 쏴아,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마치 '올라오느라 수고했다'고 칭찬이라도 하듯이.

뾰루봉가는길..
뾰루봉가는길.. ⓒ 김선호
'힘들었지, 이 바람 너무 시원하지… 고생한 만큼 보람 있단 말 이렇게 쓰는 말 아닐까?' 딸아이한테 들려주는 말은 내 자신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인 만큼 그 길이 멀고 힘들게 느껴졌다.

그곳에서부터 줄곧 평탄하게 산을 오를 수 있었다. 머잖아 곧 당도할 수 있을 것 같은 봉우리도 손에 잡힐 것 같았다. 평원 같은 산길을 걸어 1.6km로, '뾰루봉'이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가져온 물과 사과에 비스킷을 나눠 먹었다. 그 산을 오르는 동안 딱 두 사람을 만난 것 말고 사람이 없었다.

뾰루봉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천길 낭떠러지다. 왜 이름이 뾰루봉인지 정상에서 보니 고개가 끄덕여 질 정도로 산이 가파르고 험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올라온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침, 그곳으로 올라오고 있는 중년부부에게서 내려가는 길이 있음을 확인했다. 내려가는 길이 올라온 길보다 코스가 짧았다. 금방 산을 내려가서 계곡물에서 놀자는 말에 아이들이 환호를 한다.

내려가는 길은 자신 있다며 생기를 되찾은 딸아이, 하나도 지쳐 보이지 않은 아들아이, 산에 관한한 이젠 베테랑(?) 이라고 자신만만한 남편, 이 정도는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하는 나, 하산을 시작하는 지점부터 길이 만만치가 않았다. 올라오는 길 못지않은 비탈길, 하지만 올라온 길이 흙길이었다면 하산 길은 암벽으로 만들어진 더 위험한 길이 이어졌다.

이러다 말겠지 하는데 아득한 벼랑이 바로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위험천만한 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몇 번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순간을 맞닥뜨리다 보니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조심해라' 라는 말을 입에 달고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하산을 해야 했다.

뾰루봉정상에서
뾰루봉정상에서 ⓒ 김선호
고진감래라고 그런 길을 얼마정도 지나다 보니 단풍나무가 군락을 이룬 평평한 산길이 나타났다. 아, 이제는 고생 끝이다 했는데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다시 한번 암벽을 타야하는 위험천만한 길이 나타난다. 사람은 안 보이고 그길 아닌 다른 길이 없나 샅샅이 뒤져보아도 더 위험한 낭떠러지만 있을 뿐 다른 길은 안 보였다.

그렇게 위험한 길이어도 언젠가는 끝이 있겠지 싶었는데 갑자기 길이 없어져 버렸다. 송전탑이 앞에 떡하니 있고 그 주변은 땅이 산성화 되었는지 어린 아카시아 나무들이 무성하게 나 길을 막고 있었다. 다른 길이 있나 사방팔방을 돌아다녀도 딱히 내려가는 길이 없는 거였다. 문득 겁이 났다.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절벽이었다.

할 수 없이 오른쪽으로 빠져 길이 아닌 길로 들어서 가기로 했다. 길 없는 길을 나아가는 남편을 믿는 마음 한편으로 위험한 길 위에 놓인 아이들이 걱정스러워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낙엽이 덮여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것 같은 길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막막했다. 길이 될 만한 아무런 단서도 없고 무작정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제멋대로 길게 뻗은 관목의 가지에 걸려 넘어지기를 몇 번, 아이들을 안심시켜야 하는 내가 아이들 보다 오히려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 119에 연락하자' 나의 제안에 '조금만 더 내려가 보자'고 하는 남편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 어쩌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남편은 더덕을 발견했다고 땅을 파고 있었다. 한 뿌리의 더덕이 쌉쌀한 향기를 풍겼다. 그 향기가 어쩐지 새로운 희망 같기도 했다.

남편이 잠깐 나와 아이들을 세워두고 길을 찾겠다고 내려가다 혼비백산하여 다시 돌아왔다. 그때 말을 안했지만 나중에 산을 내려와 하는 말이 그랬다. '그곳에서 커다란 뱀을 봤는데 그 말을 하면 다들 더 놀랠 까봐 아무 말 못했다'고.

계곡길을 따라 내려와 마침내 길을 찾다
계곡길을 따라 내려와 마침내 길을 찾다 ⓒ 김선호
점점 지쳐가는 아이들, 노출된 팔과 다리가 나뭇가지에 쓸리고 가시덤불에 찔려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계곡물 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를 따라가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남편의 말에 따라 계곡을 찾아 아래로 내려가 보았지만 여전히 길은 없었다. 계곡을 건너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면서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연이어 이어진 산들이 생각났다. 이 길에서 다른 산으로 들어설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현실은 더욱 끔찍하게 다가왔고 길은 더욱 무성하게 관목으로 감싸여 있어서 아예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야 했다.

무슨 나무였을까?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긁적였다. 어떤 나무 근처를 지나가니 한꺼번에 모기들이 달려들어 문 것처럼 따갑고 가려웠다. 어디선가 까마귀가 울어댔다. '저 놈의 까마귀는 왜 울고 난리야?' 보이기만 한다면 까마귀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싶었다. 어느 나라에서는 까마귀를 길조라고 한다지만 적어도 산속에서 길을 잃다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는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계곡 옆에 바싹 붙어서 아래로 내려가기를 얼마동안이었을까, 드디어 희미한 길이 보였다. 이젠 살았구나 싶었는데 거짓말처럼 다시 길이 끊기고 무성한 잡목이 길을 막고는 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숨바꼭질 하듯 길을 만나고 길을 잃고를 반복하다 자동차 경적소리를 들었다. '삑' 그 소리가 그렇게나 반갑게 느껴지던 일은 아마 두 번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산행후 물놀이, '바로 이 맛이야'
산행후 물놀이, '바로 이 맛이야' ⓒ 김선호
과연 나무 사이로 산 아래 도로가 보였다. 그 즈음에선 누군가 야영을 했는지 계곡 가에 버려둔 모기장과 플라스틱 의자가 뒹굴고 있었다. 감격의 포옹. 그렇게 힘든 길을 빠져 나오고도 가시나 나뭇가지에 쓸리는 상처 말고는 별 탈 없이 산길을 내려와 준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꼭 안아 주었다. 정작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눈물이 나왔다.

딸아이가 놀렸다. '엄마, 아까 엄마 얼굴 하얗게 질려 있었어. 알아?'

산길과 인접한 도로엔 피서객들이 차량들이 이어져있었고 도로아래 청평호수엔 시원하게 물을 가르며 보트를 타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긴 또 오랜만이었다.

나중에 뾰루봉에 관한 산행기를 찾아보니 우리와 같은 코스를 탔다가 길을 잃었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제는 그 송전탑과 근처의 아카시아 나무였다. 무성한 듯 보여도 그 길을 지나쳐 가다 보면 뾰루봉 입구라고 쓰인 길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아무리 찾아도 길처럼 보이는 길이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가평군청 게시판에 항의라도 해야겠다.

생각해 보면 다시는 겪고 싶질 않은 악몽 같은 산행이었다. 어쩌면 산을 오르다가 한번쯤은 일어날 수 있을 일을 이번에 겪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말했다. '우리 다음엔 ''뾰루봉'말고 화야산(뾰루봉과 이어진 산)에 올라요' 그런 고생을 했던 터라 다음엔 산에 가지 말자고 할줄 알았는데… 다음번엔 정해진 코스를 잘 살펴서 안전한 산행을 하자고 아이들과 손가락 걸고 약속했다.

덧붙이는 글 | 아들아이는 와중에 손가락을 벌에 쏘였고, 딸아이 다리는 나뭇가지에 할퀸 상처가 그득하다. 힘들게 산행을 하고 난 후의 훈장같은 상처로 쓰리고 아프다면서도 다시 산에 갈수 있을 거라고 하는 아이들이 참으로 대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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