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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 상큼한 외모 만큼이나 마음씨도 아름다운 스무 살 처녀.
밀밭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 상큼한 외모 만큼이나 마음씨도 아름다운 스무 살 처녀. ⓒ 김남희

차츰 별빛이 스러지면서 새벽이 가까워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멀리 부지런한 오두막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어서 간간이 방울 소리가 새벽 정적을 깨뜨린다. 무거운 몸도, 배낭의 무게도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즐겁고 경쾌한 걸음을 표현할 적당한 어휘가 무엇일까.

사람이 하늘을 날지 않는 것은 그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길을 더 즐기려 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에밀 자벨


2005년 7월 7일 목요일 오늘도 흐림.
오늘 쓴 돈 : 우표 21장 16.38 + 저녁 5 + 숙박 3 +인터넷 2 = 26.38유로
오늘 걸은 길 : 나헤라(Najera) -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자다(Sto. Domingo de la Calzada) 21.5km


오늘도 언제나처럼 5시에 눈을 떴다. 어제 사다 놓은 빵과 과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6시에 길을 나선다.

눈이 커다란 처녀가 내게 와 묻는다.

"너와 함께 걸어도 되니?"
"물론이지."

그녀는 캐나다의 퀘벡에서 온 스무 살 처녀 쥬느비에브. 프랑스의 르 푸이(Le Puy)에서 시작해 지난 40일 동안 이미 1000km를 걸어왔다.

"전에 난 내가 가는 길에 장애가 생기면 그걸 확 치워버리거나 무시하고 무조건 앞을 향해 돌진하는 스타일이었어. 하지만 지금 이 길에서 난 다른 걸 배우고 있어.

처음에 난 하루에 몇 킬로를 걸어야 언제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는 걸 늘 명심하면서 거기에만 초점을 맞췄어. 그러다보니 너무 많은 걸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사람들하고의 만남도, 이야기할 기회도 잃고, 이 작고 어여쁜 마을들을 둘러보는 즐거움도 잃어버리고 있었어.

산티아고에 가서 '왔노라. 봤노라. 이겼노라' 하고 휙 돌아서서 가기 위해 여기에 온 건 아니잖아. 그래서 지금은 가이드북도 시계도 다 던져버리고 그냥 천천히 걸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즐기면서. 작고 어여쁜 마을에선 오래 멈춰 서서 쉬기도 하면서.

아마 난 산티아고까지 못 가고 캐나다로 돌아가게 될 것 같아. 처음에 산티아고를 포기해야 했을 땐 속상해서 좀 울기도 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년에 다시 오면 되는 걸."

스무 살 나이에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니!

그래, 중요한 건 어디까지 가느냐의 결과가 아니라 어떻게 가느냐의 과정인 것을!



스무 살에 인생을 깨달은 '퀘베콰' 아가씨

쥬느비에브는 서투른 영어로나마 열심히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 애쓴다(그녀는 불어를 쓰는 퀘벡 지방에서 나고 자란 탓에 영어가 서툴다).

"내년에 난 남자친구랑 같이 산티아고에 올 거야.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같이 하는 건 위험하다고들 하지만, 난 내 사랑을 시험해보고 싶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 어떻게 값어치 있는 걸 얻겠어?"

구구절절이 옳은 말만 하는 그녀.

태양이 나오지 않아 그래도 걸을 만했던 오늘의 밀밭길.
태양이 나오지 않아 그래도 걸을 만했던 오늘의 밀밭길. ⓒ 김남희
지난 40일을 걸어오는 동안 그녀는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변했다고 한다.

"난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이 길을 걷는 동안 내 안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아. 전에 난 내 인생을 결정하는 건 오직 나일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 인생을 결정하는 건 여전히 나이지만 그 길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걸 믿어."

그렇게 믿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삶의 위안이 될까.

네 시간쯤 걷고 나니 다시 오른쪽 무릎이 아파온다. 언덕의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는다. 바게트와 치즈로 간식을 먹고 다시 출발. 끝없는 밀밭길. 오늘 해가 안 나왔기에 망정이지 해가 나왔으면 땡볕 사우나 할 뻔 했다.

쥬느비에브가 내게 묻는다. "Thank you"를 한국말로 자기 수첩에 써달라고.

"내 인생에서 정말 감사하고 싶은 분들이 계시거든. 나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주신 분들이야. 그분들께 엽서 쓸 때 감사하다는 말을 각기 다른 나라 말로 적고 싶거든."

그녀가 감사하고 싶은 분들은 6개월 간 사귀다 헤어졌다는 전 남자친구의 부모님. 헤어진 남자친구의 부모님에게 편지를 쓰는 그녀. 딸처럼 사랑해주셔서 고맙다는 편지를 쓸 줄 아는 어여쁜 마음. 상큼한 외모, 발랄한 성격만큼이나 속도 깊은 '퀘베콰' 아가씨이다.

산토 도밍고 성당의 유명한 닭 두 마리

11시 반, 오늘의 목적지인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다'에 도착. 큰 알베르게를 피해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작은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씻고, 두 시간 자고 난 후 동네를 둘러보고 슈퍼에 가서 장을 봤다. 버섯과 참치와 마늘과 양파와 고추를 넣은 파스타 아라비아타와 샐러드로 나오꼬, 마끼야마 부인, 독일인 로만 이렇게 다섯이서 저녁을 먹었다.

"와. 정말 맛있는 파스타야. 산티아고 걷기 시작한 후 최고의 파스타야"라면서 다들 맛있게 먹어주니 고맙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다해 요리하는 일의 즐거움. 그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을 보며 갖는 기쁜 마음. 오랜만에 맛보는 일상의 행복이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산토 도밍고 성당의 유명한 닭 두 마리를 보러 갔다. 암탉과 수탉을 보러 성당에 간다고 하니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사실이다. 나뿐 아니라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닭들을 보기 위해 성당에 온다. 과연 성당의 동쪽 벽에는 고딕 양식의 닭장이 있고, 그 안에 하얀 닭 두 마리가 퍼덕거리고 있다.

이 닭에는 멋진 전설이 전해져온다.

살아있는 닭 두 마리를 보관하는 것으로 유명한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자다의 성당.
살아있는 닭 두 마리를 보관하는 것으로 유명한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자다의 성당. ⓒ 김남희
때는 14세기.

한 독일인 청년이 부모 및 하녀와 함께 산티아고로 성지순례를 가는 길이었다. 젊고 잘 생긴 청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하녀가 열렬하게 고백을 하며 유혹을 해왔지만, 우리의 청년, 냉담하게 모욕을 주며 응하지 않았단다.

분노와 모욕으로 제 정신을 잃은 하녀는 그의 가방에 금술잔을 넣었고, 그 이하는 뻔한 순서로 전개된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을 품은 여자의 진노는 늘 이렇게 유치한 방식으로 표현된다니!).

청년은 절도죄로 붙잡혀서 교수형을 당한다(실제로 이 길을 걷다 보면 작은 마을마다 공개처형대가 아직도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절망하고 좌절한 청년의 부모는 그러나, 신앙심 깊은 이들이라 그런 불행한 사고 중에도 순례를 계속 이어간다. 순례를 마치고 산티아고에서 돌아오는 길, 인정 많으신 우리의 신은 이 신심 깊은 부모에게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으니! 다름 아닌, 그들의 아들이 교수대에 달린 모습 그대로 살아 있는 기적을 목격하게 되는 것!

흥분한 부모는 마을의 읍장에게 달려가 기적을 이야기하고, 아들을 교수대에서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 읍장의 반응은 우리가 예상하는 그대로이다. 경멸적인 말투를 숨기지 않으며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신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이 식탁의 구운 닭 두 마리도 살아있겠구려."

그가 구운 닭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려는 바로 그 순간, 이 닭 두 마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식탁에서 뛰어내리며 요란하게 울어댄다. 결국 청년은 석방되어 부모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 신을 섬기며 평생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그 이후 이 마을의 성당은 매달 닭 두 마리를 새로운 닭으로 교체하며 성당 안에 감금하는 의식을 대대로 몇 백 년 동안 이어왔다. 이 닭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례자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 내내 행운이 함께 한다기에 아무리 귀를 기울이며 기다려도 닭들은 울지 않는다.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자다 마을의 성당 외부 벽.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자다 마을의 성당 외부 벽. ⓒ 김남희

성당의 닭들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쥬느비에브는 자기가 만난 인상 깊은 순례자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네덜란드인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에서 출발해 지난 4달 동안 걸어서 산티아고로 가고 있다고 한다. 올해 나이 여든 두 살인 스페인 할아버지. 벌써 산티아고를 각기 다른 길로 14번이나 걸었단다.

와인도 엄청 많이 마시고, 담배도 무진장 피워대는 할아버지. 그러면서도 젊은이보다 더 힘차게 씩씩하게 걷는다는 할아버지. 역시 젊음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인가보다.

덤으로 듣는 까탈이의 요리 강좌

***본고장 이탈리아인에게 인정받은 파스타 아라비아따 만들기

1. 올리브오일을 두른 프라이팬에 다진 마늘과 양파를 넣고 볶다가 풋고추를 썰어 넣고 (너무 맵지 않은 놈으로) 볶는다. (다진 마늘과 양파, 고추는 듬뿍 넣어도 괜찮다.)

2. 양파, 마늘, 고추 볶은 것 위에 토마토 퓌레를 부어 끓인다.

3. 채 썬 양송이버섯과 붉은 파프리카(파프리카에는 베타카로틴이 듬뿍 들어있어서 미백 효과가 뛰어나다. 단 이 베타카로틴은 살짝 가열해야 더 많이 형성된다)를 넣고 볶는다. 불에서 내리기 직전에 오레가루잎, 바질잎을 넣고 살짝 볶는다(없으면 안 넣어도 그만).

4. 그 사이 끓는 물에 올리브 오일 약간과 소금을 넣고 스파게티 국수를 삶는다. 가운데 심이 하얗게 보이는 수준 '알 단테'로 삶아야 맛있다.

5. 스파게티 국수를 건져 뜨거운 소스에 넣고 잘 섞은 후 치즈를 갈아 얹어 낸다.

***스페인식 샐러드 만들기

1. 참치 통조림은 기름을 빼고 적당한 크기로 부순다.

2. 먹기 좋은 크기로 찢은 양상추와 둥글게 모양을 내서 썬 양파는 얼음물에 담가 아삭아삭 하게 만든다.

3. 씨를 뺀 올리브 몇 알과 채 썬 토마토, 옥수수 통조림을 준비한다.

4. 위의 모든 것을 큰 볼에 담은 후 올리브 오일(샐러드용 올리브 오일은 최상급인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이 좋다)과 식초(일반적인 한국 식초는 신맛이 너무 강하므로 신맛이 약한 걸로 준비하기)를 듬뿍 뿌려 먹는다.

***더 맛있게 먹는 법

여기에 차갑게 식힌 로제 와인 혹은 스페인 로그로냐 산 적포도주 한 병을 곁들이고,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갓 구운 바게트도 있다면 금상첨화) 사랑하는 이들을 초대해 함께 먹는다. / 김남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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