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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건물앞에 내걸린 삼성그릅 깃발.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건물앞에 내걸린 삼성그릅 깃발. ⓒ 오마이뉴스 권우성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자’고 말한다. 역사의 지난 경험을 통해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하지 말자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보도된 삼성의 지난 날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걸어온 길을 축약할 수는 있어도 불필요한 시행착오 없이 완전히 건너뛰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사정이 그렇다면 괜히 마음만 급해 그 굴곡진 역사의 길을 건너뛰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아예 길을 다져가며 천천히 걸어 갈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삼성군주국’의 딜레마 속에서 이제는 먼지가 쌓여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떠올렸다. 이 문건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현실적 시효를 다한 역사적 문건이므로 긴장감 없이 이번 일을 계기로 함께 음미해보기를 권한다. 이 선언에는 엄청난 인용을 자랑하는 국가권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적나라한 구절이 등장한다.

“현대의 국가권력은 부르조아 계급 전체의 공동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유명한 구절은 그동안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문장 그대로가 아니라 나름대로 그 의미를 새겨들어야만 했던 은유였다. 왜냐하면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우리의 국가권력은 자본의 수동적 위원회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압도적인 정권우위의 상태에서 독점자본을 만들어내고 통제하고 때로는 협박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과잉으로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다음과 같은 법정증언이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코믹하게 입증한다.

“내가 돈을 받지 않으니 기업인들이 되레 불안을 느껴 투자를 하지 못했다. 기업인들은 내게 정치자금을 냄으로써 정치안정에 기여하는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인터넷이코노믹리뷰>, 2005년 4월 28일)

전두환 시대를 생각해보면 그동안 우리의 국가권력은 <공산당 선언>이 설명한 자본일반을 위한 성실한 관리자의 역할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폭력적으로 자릿세를 받는 조폭들의 ‘삥땅뜯기’ 역할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착각이 들 정도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자본에 대한 압도적인 정권우위’의 질서였다. 그러나 시간은 꽤 흘렀고 이제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지난 5월 노무현 대통령은 대ㆍ중소기업 상생협력 대책회의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있다. 시장에서의 여러 가지 경쟁과 협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오마이뉴스>, 2005년 5월 16일)

나는 이 말이 반만 맞았다고 생각한다. 전두환 시대를 상기하면 권력이 정권을 어느 정도 떠난 것까지는 맞는 것 같은데 그 권력이 아직 시장으로 넘어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즉 권력은 ‘정권’을 떠났지만 아직 ‘시장’에는 도달하지 못한 상태라는 말이다. 이번에 불거진 삼성의 최근 행태가 그것을 입증한다. ‘정권에 대한 자본일반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말이 가능해야 한다. 다시 <공산당 선언>이다.

“부르조아지 내부의 알력을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몇 가지 이해관계를 법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 실례로 영국에서는 10시간 노동법이 통과되었다.”

이 문장의 사연을 안다면 생뚱맞은 인용이 아니라는데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예컨대 자본을 구속하는 노동법이 단순히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쟁취되었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 노동법이 자본일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별자본의 원시적인 무한경쟁은 그 재사용을 불가능하게 할 만큼 노동력을 황폐화시켰고, 이 사실을 깨달은 자본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상호협정의 일환으로 10시간 노동법을 제정하는데 협력했다는 의미다.

왜 지금 이 원시자본의 이야기를 꺼내는가? 삼성의 행태 때문이다. 삼성은 지금 국가를 “부르조아 계급 전체의 공동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삼성의 업무를 관장하는 사적 권력’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단순히 ‘정권에 대한 자본일반의 우위’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전체가 대상이 된 전방위적인 ‘삼성군주국’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대표적인 개별자본 삼성은 ‘무노조 경영’이 보여주듯 아직 원시자본의 유혹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삼성의 이러한 태도가 과거 파쇼적 권력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아니면 피해의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갖고 지금도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다 중요하다. 만약 모든 개별자본이 여전히 ‘자본 공동의 이익’이라는 관념 없이 삼성처럼 행동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권력은 아직 “시장에서의 여러 가지 경쟁과 협상에 의해 결정”되는 일반적 상태, 즉 ‘정권에 대한 자본일반의 우위’라는 정상적(?) 상태에 도달했다고 절대로 선언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정권이 “부르조아 계급 전체의 공동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가 아닌 ‘개별자본의 사적 권력’으로 전락한다면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일까? 단순히 도덕적 비평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틀림없이 개별자본의 경쟁력을 무시한 막무가내 식 성취를 위해 전체 자본의 효율을 결정적으로 취약하게 만들 것이다. 1997년 그 참담한 IMF시대를 눈앞에 둔 시점에도 삼성은 이회창 후보에게 돈뭉치를 뿌리면서 기아자동차 인수에 눈이 멀어 있었다.

이번 미디어의 보도에 많은 이들이 경악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압권이 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언론사인 <중앙일보> 사장이었던 홍석현 현 주미대사가 ‘삼성주인’으로부터 나왔을 돈 박스의 ‘퀵배달 서비스’를 위해 동분서주했다는 내용일 것이다. 이런 사장을 위해 검찰청 앞에서 “사장님 힘 내세요”를 외치던 <중앙일보>기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대한민국의 미디어 전체가 <중앙일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앞으로 동업자로서 엄청난 불신의 부담을 함께 떠안고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민들에게 모든 언론이 언론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부담이다. 언론에 개별자본의 이익이 아닌 ‘공동이익’이라는 관념을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요구가 아니다. 자본의 관점에서 말한다 해도 그것 없이는 자본 전체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신뢰를 결코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나오는 불가피한 요구다.

이 사건을 정리할 대단히 중요한 아이러니가 있다. 1997년 당시 “노조와 호남한테 아무리 아부해봤자 절대로 안 되니, 확실하게 보수 편에 서라”고 조언하며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이번 사태의 주인공 홍석현 주미대사가 현 노무현 정권의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발탁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표방하는 당파성이 무엇이건 정권은 “부르조아(와 영남) 계급 전체의 공동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의 성격을 벗어나기 대단히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설명할 별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어 <공산당 선언>을 인용했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지만 그 선언은 역사적 한계가 있는 문건일 뿐이다. 역사의 진화는 지금까지 그 선언이 충분히 설명하고 있듯이 국가권력이 개별자본의 무한경쟁을 방관하던 원시적 축적기간을 거쳐, 전체 자본의 공동이익을 관리하는 보다 진전된 국가권력이 등장했으며, 이제 그 국가권력이 전체 국민의 통제 하에 놓이는 시대까지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역사적 위치는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과연 정권은 자본일반을 위한 성실한 관리자의 역할에 그치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일까? 전체 국민을 위한 정권을 생각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갈 길이 한참 먼데 어쩌면 우리의 현실은 훨씬 더 원시적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식주는 21세기에 있는데 우리들을 지배하는 의식구조는 여전히 <공산당 선언>에서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는 19세기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사태가 시도 때도 없이 불거지는 요란하지만 단순한 정치스캔들 중의 하나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사태의 주인공 홍석현 주미대사의 거취가 모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라가 가야 할 길이 아주 멀다. 나라 전체에서 ‘민주공화국’으로의 진화를 가로막는 ‘삼성군주국’의 원시적 흔적들을 하나씩 분명하게 제거해야 한다. 개별자본에 의한 국가권력의 사적 점령이 더 이상 방치돼서는 안 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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