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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비 정면. 노래비의 크기는 옆에 앉은 사람이 얼마나 작아 보이는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래비 정면. 노래비의 크기는 옆에 앉은 사람이 얼마나 작아 보이는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김유자

노래 가사가 있는 후면. 노랫말이 있는 쪽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철도청 관사를 향하고 있습니다.
노래 가사가 있는 후면. 노랫말이 있는 쪽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철도청 관사를 향하고 있습니다. ⓒ 김유자
제가 사는 대전에도 물론 노래비가 있습니다. 대전의 관문이랄 수 있는 대전역 광장 한 쪽에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이렇게 시작하는 '대전부르스' 노래비가 서 있지요.

대전역 광장 노래비가 갖추지 못한 것

언젠가 사진으로 바라본 강원도 주문진 해안가에 있는 배호의 노래비 '파도'는 아담하지만 조형미도 갖춘 기품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99년 9월 철도청이 한국철도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다는 '대전부르스' 노래비는 턱없이 거대하기만 했지 별다른 조형미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직접 자를 가지고 재어 보질 않았으니 정확한 크기야 말할 수 없지만, 노래비의 폭이 얼마나 되나 걸어봤더니 제 걸음으로 열 걸음이 훨씬 넘더군요.

지금은 저 노래비가 미안한(?) 듯 광장 한 구석으로 비켜서서 등을 돌리고 있지만 처음에는 광장 한 복판에 가로로 떡 버티고 있었답니다. 대전역으로 가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노래비를 애써 우회해서 돌아가면 되긴 했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아무 죄 없는 노래비에게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노래비 크기가 이쯤되면 시각 폭력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닐 듯 합니다.

현재는 노래말이 적힌 쪽이 지나는 사람들이 드문 철도청 관사 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구보고 보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읽어보지 않는 노래비는 이미 노래비로서 효용을 상실한 것 아닐까요? 노래비를 바라보는 마음이 선뜻 정답고 사랑스럽게만 느껴지지 않는 건 제 심사가 비비꼬여서일까요?

크기에 대한 불만 말고도 이 노래비에는 애들이 쓰는 말로 딱 2% 부족한 게 있습니다. 대전역 광장이 가진 상징성을 충족시키고, 더 나아가 시민의 정서에도 부합할 수 있는 것이 꼭 노래비밖에 없었느냐는 점과 노래비를 세우기 전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최소한의 절차라도 있었느냐는 겁니다.

이곳이 엄연히 철도청 땅이고, 그러니 무얼 세우든지 우리 맘이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이곳이 말 그대로 대전시의 얼굴이자 대전의 관문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렇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 김유자
지금은 대전연정국악문화회관으로 명칭이 바뀐 옛 대전시민회관 뜰에는 한성기 시인의 <역>이라는 시비가 서 있습니다.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정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만 역처럼 내가 있다.

한성기 시 '역' 전문


시가 던져주는 깊고 긴 여운에도 불구하고 이 시비를 들여다 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합니다. 바로 코 앞까지 들어찬 차량이 막고 있기도 하지만 이곳이 애초부터 이 시비와는 궁합이 맞는 장소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노래비와 시비를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한 제안 한 가지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한성기 시인의 시 '역'이 대전역 광장으로 가고 '대전부르스' 노래비가 대전연정국악문화회관으로 옮겨오면 어떨까 싶습니다.

대중가요와 국악이 서로 격이 다르다고 반대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노래라는 큰 틀에 놓고 바라보면 그다지 어색한 일도 아닐 듯 싶습니다.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빛이 나고 아름다운 건 사람이나 사물이나 마찬가지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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