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교육부의 정책에 맞서는 일부 언론들을 배경으로 하여 교육계에 새로운 쟁점이 하나 부각되려 하고 있다. 고교 평준화 정책에 대한 논란이 그것이다. 그 동안의 흐름에 비춰 보면, 대학 입시에서 본고사와 고교등급제, 기부금입학제를 금하는 3불 정책에 대한 논의가 초점을 다면화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설득력 있는 근거 없이 특정 계층의 이해만 대변하는 소위 메이저 신문들을 제쳐놓고 보면, 이러한 논란의 한쪽 정점에 서울대 총장이 있다. 대한상의 주최로 열린 7월 18일의 최고경영자 대학 특강에서 정운찬 총장은, 2008년 서울대 입시안에 대한 소신과 더불어 고교 평준화 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공개했다. '원자재'가 좋아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비유를 들면서 그는 입학시험의 '솎아내는' 기능을 지목했다.

서울대가 내놓은 2008년도 입시안은 전체로 볼 때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정 총장의 '원자재'론은 입시 정책과 관련하여 대학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 판단된다.

질 좋은 원자재를 써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들린다. 하지만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고급 원자재를 독점해온 생산자가 그 동안 만들어낸 제품이 원료에 비해서 훌륭한 것이 못 되었다면? 그 이유가, 일류 원자재에만 눈독을 들여온 탓에 생산 기술이나 방법을 발전시키지 못한 결과라면? 그 결과, 선무당이 장고 탓하듯 원자재의 질만 따지는 풍조가 널리 퍼져 생산의 본래 목적이 왜곡되게 되었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에 따라 하청업체들의 생산 행위가 심각하게 교란되고 있다면?

유감스럽게도 이들 질문에 대해 서울대는 그다지 할말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반세기 넘게 서울대는 이 나라의 최고 인재를 독점해왔지만, 비합리적인 학벌주의에서 유래된 '서울대 졸업생'이라는 딱지의 위력을 제외한다면, 서울대가 그 훌륭한 인재들을 제대로 교육시켜 뛰어난 졸업생으로 만들었다고는 하기 어렵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엘리트들 상당수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외국 대학(원)이 길러냈다고 할 수 있다.

두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지난 2월 한국공학한림원에서 조사한 '이공계 활성화와 우수 인력 양성을 위한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대 교육의 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서울대와 카이스트, 포스텍,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의 여섯 학교를 대상으로 하여, 전공 관련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학부 및 대학원 졸업생들에게 수업 환경 만족도를 묻고 있다. 전공 만족도, 교수 강의 만족도, 대학 당국의 공대 지원 정책, 지도교수와의 상담, 수업 내용 업그레이드의 다섯 항목으로 결과가 나왔는데, 놀랍게도 서울대는 전체 항목 모두에서 꼴찌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대에 입학할 때 일류였던지라 그 졸업생들의 기대치가 높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이것이 서울대 졸업생들이 보는 서울대 교육의 현주소라 하면, 다음은 전국 대학(생)이 보는 서울대의 한 모습이다.

지난 6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를 통한 최근 2년간 전국 대학의 학위논문 이용 현황을 조사한 바 있다. 그 결과, 학위논문의 원문 다운로드 횟수 상위 20개 대학 중에서, 서울대는 논문 보유 수는 1위인 반면 논문 1편당 다운로드 횟수에서는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예들은, 서울대의 교육이 '원자재의 질'을 십분 살리지 못했고, 생산 기술이나 방법 곧 교육 방식을 개선하지도 않았음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몸집을 키우는 방식으로 원자재의 질에 기대어 자신을 유지해왔을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 대학의 입시 현황을 돌이켜보면서 이러한 결과를 마주 대하면, 서울대가 주력해야 할 사항이 무엇인지는 금방 자명해진다. 학생들의 성장 가능성이라는 점에서는 그다지 의미 없는 수치 놀음으로 '질 좋은 원자재'를 독점하려는 데 혈안이 되는 대신, 기왕의 과오를 반성하고 자신들의 원자재를 훌륭한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방식과 여건을 갈고 닦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정 총장과 서울대는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한편으로 평준화 정책을 문제시하고 한편으로 대학 자율권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은 돌보지 않고 문제의 원인을 다른 데로 넘기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교교육의 질을 문제시하기 이전에, 대학교육의 질을 돌아보아야 한다. 적어도 대학 당국자들은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학의 문제를 고등학교로 떠넘기는 문제적인 사례가 자칭 일류대들이 불법적으로 시행해왔다고 의심되는 고교등급제일 터인데, 이제 서울대는 이러한 흐름에 힘을 실어주고 스스로 그 모범이 되고자 하는 듯싶다. 이러한 행태는, 국민이 아니라 기업의 눈치만 보면서 대학교육의 목적이 편향, 실종되는 것과 맞물리면서, 이제 중고교 교육 전체를 흔들고 있다.

서울대가 일류 신입생을 긁어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는 만큼, 고등학교는 중학 졸업생을, 중학교는 초등학교 졸업생을 줄세우게끔 내몰리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오래 전에 허울만 남았기에 입에 올리기도 뭣하지만, '전인교육'이라는 이상도 새로운 세기에 맞는 '적성을 살리는 창의적인 교육'이라는 중차대한 과제도, 학생을 잘 가르치고 길러내기보다 '솎아내기'에만 급급해 하는 이러한 현실에서는 꿈꿀 수조차 없어진다. 이러한 현상을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덧붙이는 글 | 박상준 기자는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입니다.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도 송고했습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