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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새벽 예불. 전에는 탑돌이도 하고 참가하는 스님의 수도 훨씬 많았는데...
화엄사 새벽 예불. 전에는 탑돌이도 하고 참가하는 스님의 수도 훨씬 많았는데... ⓒ 이승열
새벽 세시 십분. 온통 어둠뿐, 화엄사로 향했다. 지리산을 통째로 덮은 하얀 안개는 숲과 나무와 길과 사람들을 젖게 했다. 범종소리가 깊게 울리며 이승과 저승 끝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참가한 스님 수가 적고, 탑돌이가 생략된 화엄사의 새벽 예불은 기대한 것보다 단출했다.

아직도 알코올 냄새가 가시지 않은 육신들. 인월 막걸리로 시작된 질펀한 술판은 급기야 구례에서 통닭에 생맥주, 족발까지 배달시킨 뒤 한시 반이나 돼서야 끝이 났다. 주당의 요건 중 둘은 갖춘 셈, 청탁불문에 원근불문까지. 채 두 시간도 자지 않은 채 화엄사 새벽 예불에 참가한 것 자체가 거의 기적에 가깝다. 불자도 아닌 주제에 말이다.

대웅전 뒤편 구층암을 향했다. 어젯밤 아흐레 하얀 반달이 감쌌던 구층암을 온통 새벽안개가 감싸고 있다. 예불을 마친 스님들이 하루를 준비하는 시각, 이 큰 지리산 자락에 오로지 나 혼자뿐이다.

ⓒ 이승열

저 끝을 나가면 천상에 다다를까? 구층암 가는 길
저 끝을 나가면 천상에 다다를까? 구층암 가는 길 ⓒ 이승열
천불전 앞, 이백 년이 넘었다는 모과나무에 울퉁불퉁한 모과가 가지가 찢어질듯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살아 있는 모과나무는 산 채로 천불전 앞에서, 생명을 다한 모과나무는 뿌리째 기둥이 되어 지붕을 받치고, 인간들에게 말없이 자리를 주고 있었다.

모과나무를 툭툭 베어내어 농익은 솜씨로 앞, 뒤가 없는 남, 북 모두가 정면인 구층암 승방 이쪽저쪽을 옮겨가며 그저 어린 중생은 마음만 한 자락 떼어내 그곳에 남겨뒀을 뿐이다. 조선의 이름 없는 목수는 어떤 생각으로 모과나무를 통째로 뽑아 뒤집어 뿌리 위에 공포를 얹었을까. 어떤 자신감이 그로 하여금 Y자로 벌어진 모과나무로 거리낌 없이 기둥으로 쓰게 했을까?

구층암 승방 남쪽. 소박한 석탑과 사자가 천상을 지키고 있다.
구층암 승방 남쪽. 소박한 석탑과 사자가 천상을 지키고 있다. ⓒ 이승열

불국토을 지키는 용맹한 퇴마사 사자.
불국토을 지키는 용맹한 퇴마사 사자. ⓒ 이승열
서툰 듯하면서도 능숙한, 능숙한 듯하면서도 서툰 듯 꿈틀거리는 모과나무 기둥이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쓴 봉은사 '판전' 편액을 보는 듯하다. 옹이가 그대로 드러난 나뭇결, 울퉁불퉁한 기둥에 기대어 앉으니, 구층암을 완성한 조선의 이름 없는 목수가 한없이 고맙고 그립다. 빈 듯하면서 꽉 찬, 꽉 찬 듯하면서도 여유가 있는 구층암에서 추사를 떠올린 것이 지나친 억측일까?

휘어진 나무는 휘어진 채고, 옹이가 박힌 나무는 옹이가 박힌 채로, 남쪽에서 자란 나무는 남쪽 승방에, 북쪽에서 자란 나무는 북쪽 승방에 그렇게 인공구조물도 하나의 자연이 되어 있었다. 모과나무 밑동은 주춧돌이 되어, 줄기는 기둥이 되어, 잔가지는 서까래와 지붕이 되어 다시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 이승열

생명을 다한 모과나무는 기둥과 들보와 지붕이 되어 다시 생명을 이어가고, 생명이 있는 모과나무는 생명을 다해 모과를 맺고.
생명을 다한 모과나무는 기둥과 들보와 지붕이 되어 다시 생명을 이어가고, 생명이 있는 모과나무는 생명을 다해 모과를 맺고. ⓒ 이승열
자리를 옮긴 모과나무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은 무명의 목수는 자신의 완성품 벽면에 상징을 새겼다. 회칠한 하얀 벽면에 사자를, 툇마루 위 들보에 코끼리를 새겨 부처의 나라를 완성했다. 지리산의 어둠이 순식간에 걷히면서 구층암도 찰나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젠 세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마음은 통째로 그 곳에 남겨둔 채, 구층암을 향한 절절한 마음만 가득 채워 다시 내가 사는 세상으로 나와야할 시간이다. 세간과 출세간이 본래 한자리 아닌가?

옹이진 것을 그대로 옹이를 드러내고, 울퉁불퉁한 줄기는 그대로 기둥이 대어 사람들을 맞는 곳
옹이진 것을 그대로 옹이를 드러내고, 울퉁불퉁한 줄기는 그대로 기둥이 대어 사람들을 맞는 곳 ⓒ 이승열

그대로 풍경이 되어버린 수세전. 저 문을 열고 싶다.
그대로 풍경이 되어버린 수세전. 저 문을 열고 싶다. ⓒ 이승열
구층암에서 하루를 연 날, 사람들을 향한 원망이나 미움이 눈곱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는 구층암을 완성한 조선의 대목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세상을 전세 낸 듯한 큰 목소리로 날 힘들게 했던 인간들, 앞, 뒤 꼭 막혀 분통 터지게 했던 인간들, 위, 아래 없이 반말 찍찍거려 말도 섞지 않고 살았던 인간들.

오늘 하루, 단 하루만이라도 그들을 향해 눈을 맞추고 마음을 열자. 내가 알고 저지른 잘못, 모르고 상처를 입힌 사람들에게 진정 참회하자. 노고단으로 오르는 돌길, 또 다시 지리산은 온통 안개뿐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의식적 노력 없이 가능하다.

주위 사람들과 눈 맞추고, 물으면 답하고, 배고프면 먹자 말하는 일이 무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난 이미 구층암과 사랑에 빠졌는데,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아등바등하며 사람들을 향해, 세상을 향해 시퍼런 칼날을 갈며 살 일 있겠는가.

길상암 가는 길. 저곳을 지나 소용돌이 굽이치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과 만난다.
길상암 가는 길. 저곳을 지나 소용돌이 굽이치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과 만난다. ⓒ 이승열

덧붙이는 글 | - 2005년 7월 15일 구층암 풍경입니다.
-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사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화엄사 대웅전 바로 뒤에 천상에 이르는 입구가 있습니다.
- 구층암 뒤 길상암의 존재를 알려주신 장권호 기자님께 진정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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