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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은 국민 위에 있으며, 동시에 국가 밖에 있는 뛰어나고도 특별한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국민의 상식을 뛰어 넘을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국민의 기대를 짓밟을 수 있을 만큼 탈국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 동안 국민들이 원치 않았던 일이 국회에서 자행되던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만, 지난 6월 30일 국회에서 통과시킨 일련의 정치관계법을 보면서, ‘역시 정치인을 국민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는 어렵구나’라는 생각이 다시 든다.

이번 개정된 지방의원 유급제와 기초의원 공천제, 기초의원 선거구의 중선거구제, 그리고 기초의원의 비례제 도입 가운데는 국민이 강력하게 원했던 것이 있고, 제도화는 되어야 하지만 보완을 요했던 것도 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도 있고, 또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이 다 들어 있다. 사실, 이 모든 제도는 다 독립 변수로서 지방자치의 발전이라는 대의 속에서 제 각기 도입 혹은 폐지, 보완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은 이것들을 서로 종속변수로 만들어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연장시키고 권력 구조를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뭉뚱그려 버렸다.

유급제 도입의 대 전제는 공·내천제 폐지였다

먼저, 지방의원 유급제 도입은 지방자치제도가 재개되고 지방의원이 무보수 명예직으로 활동하고 만 14년만의 일이다. 지방의원의 유급제는 제2기 지방의회부터 적용할 것처럼 1994년 표면화된 이래, 지방의원 달래기 차원에서 총선 즈음마다 대두되다가 유야무야되곤 했다. 주민들 역시 이 논의의 저변에 깔린 정치인들의 불온한 의도성만을 예단하고 유급제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면서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 4월, 지방의원을 유급제로 한다는 ‘지방자치법개정법률안’에 173명이라는 많은 수의 국회의원이 서명하자 지방의회와 의원들에 대한 주민과 학계, 시민사회단체의 관심은 최고조가 되었다. 물론 비용의 문제였다. 지방의회의 기능과 지방의원의 자질을 회의하기만 했던 그들은 그 많은 의원들을 세금으로 먹여 살린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급제 시행이 가능해질 것 같이 보이자 보완책을 내놓으면서 어떻게든 국회의 안대로 시행되는 것을 막아보려 했다.

제시된 여러 보완책 중에 가장 타당하고 절실했던 것은 정당의 공․내천 관행 폐지, 의원을 감시하는 주민참여제도 도입, 그리고 기초의회의 중선거구제였다. 지방의원 공․내천제 폐지와 중선거구제야말로 동네의원, 정당에 줄서기 하는 의원의 문제를 개선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졌다. 지방자치제도의 실효성을 경험해가던 국민들의 인식 속에서 지방자치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당의 지방의원 공․내천과 소선거구제로 이것은 부패한 중앙 정치가 지방으로 그대로 전이되는 가장 위험한 도구였다. 거기에 국민은 기초단체장의 공천제도 폐지되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기초의원 공천제는 비례 대표의원을 두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

그런데 이런 국민의 의사나 요구와는 상관없이 국회의원들은 아예 한 술 더 떠 기초의원까지 공천제로 묶어 버렸다. 공직 선거는 경선으로 한다는 당규들에 따라 기초의원 역시 공천 경선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천 경선 과정에서의 그 많은 시비와 부정이 지역 사회에 미칠 정신적 폐해에 대한 책임은 과연 누가 질 것인지. 무엇보다 공천 후보자가 더 훌륭한 후보자라는 상식 같은 것은 결코 형성될 것 같지 않은 판국에 말이다. “만약 사탄과 바알세불이 공천자로 지목되고 대천사 가브리엘이 무소속으로 나온다면 가브리엘이 당선될 확률은 전혀 없다”라고 버트런드 러셀이 말한 적이 있다. 이는 비록 수십 년 전의 말이지만 조직의 위력과 정치인의 술수와 유권자들의 변함없는 타성을 생각할 때 이 시대의 사람들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비유임에 틀림없다.

확실히 정치인에게는 국민의 정치의식을 뛰어넘는 특별한 정치술과 혹은 탁월한 결단력이 있다. 그것이 여기에서는 바로 기초의회에 비례의원을 둔다는 발상과 선택으로, 이강래 정치개혁특별위원장은 “비례의원을 두기 위해 기초의원 공천제는 불가피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기초의원 비례제를 요구했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여성계가 여성의원 확보를 위해 기초의원 할당제를 그런 식으로 요구했나? 현재 기초의회의 여성의원 비율은 2. 2%로 국민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열악하며, 그나마 이 숫자의 여성의원도 거의 도시 지역의 기초의회에 몰려 있을 뿐, 여성의원이 한 명도 없는 지방의회는 전국적으로 80%를 넘고 있으니 지방의회의 여성의원 진출은 여성계의 큰 숙제가 되어 왔다.

여성의원 확보와 무관한 비례대표제

그러나 최근까지 여성계의 요구는 기초의회에 비례의석을 확보하여 여성의원 수를 담보하라는 것에 있지 않았다. 여성계는 지방자치 발전의 비전과 무관한 비례대표제를 당초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유해 요소가 상대적으로 적은 ‘남녀동반 선출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가 그만한 숫자의 여성 후보자를 확보하는 데 따른 현실적인 부담을 고려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비례대표제 도입의 배경에 여성의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레토릭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긴 하다. “기초의원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것이 또한 정개특위 위원장이 말한 도입 목적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동안 기초의원의 자질과 역량에 대한 불신은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라는 국민적 요구는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었다. 국민들이 가장 반대했던 제도를 끌어들이면서 국민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제도로 이유를 삼는 정치인의 계산법은 이렇게 다르다.

그렇다고 여성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100분의 50 이상을 여성으로 추천 한다’는 조항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위반시 등록무효사유로는 보지 아니하도록 함’이라는 단서 조항이 뒤 따르니 이렇게 코믹한 법 조항도 있나 싶을 따름이다. 여성의원 확보라는 그림은 보여주면서 그 실효성을 담보하는 장치를 의도적으로 배제시킨 정치인의 곰상스러움에 웃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지 싶다. 기초의원 공천 경선과, 또한 선거구역이 확대된 중선거구제의 선거 운동에서 여성 후보자가 상대적으로 불리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번 도입된 4대 제도 가운데 여성의 지방의회 진출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만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공천제와 함께 하는 중선거구제, 당리당략의 정치판이 될 것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이 모든 제도는 지방자치의 발전 도정에서 각각 독립 변수로서 논의되어 보완과 개폐의 운명을 겪어야 할 것들이다. 예를 들어 유급제의 경우, 지방자치제도의 목표 달성을 위해 얼마만큼 지방의원의 역할이 필요하며 또 얼마만한 투자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용 계산이 지방의회가 재개되기 전부터 있어야 했다. 국회의원의 자질 시비가 그들의 소위 ‘세비’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처럼 지방의원의 활동성과나 자질도 유급화의 전제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하물며 지방의원 유급화가 공천과 맞물려 도입된다는 것은 지방의원을 벌어 먹이는 사람이 바로 공천권자인 국회의원 자신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 것 이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국민이 중선거구제를 원했던 것은 그것 역시 중앙 정치에 예속되지 않는 지방자치를 구현해볼 수 있는 방안이라고 기대했을 따름이라 국회에서 민의를 알았다면 깨끗이 중선거구제를 도입했으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천제라는 전제 속에서 중선거구제는 오히려 기초의회를 당리당략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판으로 만들고 말 것이 자명하다. 한 선거구에서 2, 3인의 의원을 선출하는 것이니 적어도 민노당까지는 영호남을 막론하고 전국의 모든 지역구에서 고루고루 당선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그들은 지역구도 타파라고 부른다. 지역구도 타파라는 가장 큰 정치 난제는 국회의원의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해결가능하다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소선거구는 그대로 두고, 지방분권의 중요성이 갈수록 대두되는 이 시점에서 기초의회를 중선거구제로 만들어 놓았는지 그저 하나하나가 의아하고 우스울 따름이다. 기초의회의 중선거구제로써 국민이 줄줄 꿰고 있는 지방선거의 폐해들이 정당정치의 현실 앞에 무참히 양성화되어버린 것이다.

정개특위라는 것이 부패한 정치의 틀을 잡고 폐단을 드러내어 민의를 살려 정치를 바르게 하자고 설치한 기구인가 했는데, 결국 그들이 했던 것은 민노당을 위시한 정당간의 윈윈 게임이었다.

국회의원은 이 네 제도를 오히려 지방정치의 예속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뭉뚱그려서 국민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만한 여지를 차단시켜버렸다. ‘유급제는 그동안 수년에 걸쳐 논의되어 왔던 것으로 지방의원도 정당한 보수가 필요하지 않나? 중선거구제는 동네 의원의 한계를 넘어서고 국회의원에 줄서기 하는 폐단을 없애줄 것이야. 비례대표제는 그렇게라도 해서 여성의원 숫자가 늘어나면 다행이고, 공천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전체적으로 30%의 불만이 있지만 그 정도면 양호한 법 개정 아닌가?’ 하면서 넘어가 준 것이 이번 개정된 일련의 정치관계법이다. 그래서인지 시민단체든, 언론이든 이번 지방자치 관련 법 개정들에 대한 어떤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결국 건전한 지방자치를 통해 중앙 정치를 변화시키기를 원했던 주민들의 소박한 꿈이 기초의원 공천제로써 다 깨지고 말았다. 동시에 국민들은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시대의 정치인들에 대해 썼던 셸리의 씁쓰름한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보지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통치자들,/ 그러나 기력을 잃어가는 저들의 조국에 ***처럼 들러붙어 있나니…”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북지역 인터넷 대안신문 '참소리'에 7. 16일 이후 게재됨.
이재천 기자는 전주시의회의원을 두 차례 역임했고, 정치비평서 '의회의 리비히 법칙'의 저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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