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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버른 시위대.
ⓒ 호주노동조합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우리는 지금 벼랑 끝에 몰려있는 상태다. 자본주의 사회의 강력한 무기인 돈을 쥐고 있는 자본가들이 마침내 의회까지 장악하게 됐으니 노동자들의 장래는 불 보듯 뻔하다. 우리가 길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집단이기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생존권 사수를 위한 몸부림이다."

서울이나 울산, 그 어디쯤에선가 익히 들어왔던 내용의 목쉰 음성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곳은 한 시절 '노동자의 천국'으로 불렸던 호주, 그것도 노동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시드니 서부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였다.

슬픈 날… 2005년 7월 1일

발언의 당사자는 뉴사우스웨일스(이하 NSW) 건설노조 조합원 로브 기그(42)씨. 그는 시드니 타운 홀에서 열린 NSW노조연합 집회에 참가하고 귀가하는 중이었다. 동료노동자 두 명과 함께 시위에 참가한 기그씨는 역 근처의 선술집으로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가 맥주를 마시는 것은 그날뿐이 아니었다. 그는 일을 마치고 귀가하면서 습관처럼 그곳에 들러 동료들과 맥주 몇 잔을 마신 다음에 집으로 향하곤 한다. 그건 호주노동자들의 오래된 전통이다.

맥주 몇 잔을 거푸 들이킨 그는 "우울하고 슬픈 날이다. 오늘은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자유-국민 연립당 정부가 마침내 칼자루를 잡은 날이기 때문이다"라고 탄식하더니 "그러나 우리는 하워드 총리에게 노동조합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줬다"고 힘주어 말했다.

로브 기그씨가 7월 1일을 슬픈 날이라고 말한 이유는 집권보수정당인 자유-국민 연립당이 2004년 11월 총선의 승리를 통해 말콤 프레이저 정부 이래 20년 만에 연방의회의 상하 양원을 장악, 이 날부터 새 임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존 하워드 자유-국민 연립당은 출범 뒤 '노사관계법'을 전적으로 사업자 위주로 바꾸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법안을 개정하려면 상하 양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호주에서 '신자유주의'를 마치 종교처럼 신봉하는 극우성향의 존 하워드 총리가 그동안 별러왔던 노사관계법 개정을 마침내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존 하워드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사관계법 개정을 시도했으나 야당인 노동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상원을 통과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 호주는 노사관계법뿐만 아니라 의료보험법 개정, 정부가 50%의 지분을 갖고 있는 호주 최대의 통신회사인 텔스트라의 100% 민영화 등 여러 사안이 위기에 놓이게 됐다.

호주 노동자들이 우려하는 것들

▲ 시위 중인 호주노동조합원들
ⓒ 호주노동조합
'운명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6월 30일, 호주연방노조(ACTU)의 본부가 있는 멜버른에서는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왔다. 브리즈번과 퍼스에서도 각각 2만 명, 1만1천 명이 모여 노사관계법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디데이인 7월1일에는 NSW주의 200여 군데에서 항의집회가 열렸다. 약 2만 명 정도가 시드니 타운 홀에 집결해서 시위를 벌이고, 그 시위 과정을 스카이 채널을 통해 200여 지역의 집회장소에 중계했다. 한인밀집거주지역인 스트라스필드 역 주변에서는 한인노동자들의 집회도 열렸다.

교사, 간호사, 경찰관, 소방관 등이 포함된 단위별 집회는 주로 노동자 클럽이나 재향군인 클럽 등에서 TV를 시청하면서 진행됐다. 이런 형태의 시위는 호주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방식이었다.

호주 노동자들이 우려하는 부분은 △ 노동자의 최저임금이 주당 484호주달러(약 38만7000원) 이하로 하향조정 될 수 있다 △ 4주간의 휴가수당이 폐지될 수 있다 △ 연 8일간의 병가일수를 줄일 수 있다 △ 오버타임 수당을 보장받기 힘들 것이다 △ 고용자 100명 이하의 사업장에서는 불공정해고법이 제외될 수 있다 △ 고용자 100명 이상의 사업장에서도 6개월 동안 불공정해고법이 제외될 수 있다 등.

시드니 타운홀 집회를 주도한 NSW주 노조연합 존 로버트슨 사무총장은 "강력한 적군이 나타나면 아군도 결속하게 된다"며 "그간 단위노조의 활동상에 비해 비교적 느슨했던 노조연합이 이렇게 결집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보수성향의 기독교단체도 반대

▲ 시위에 나선 소방관들.
ⓒ 호주노동조합
보수적인 기독교계도 노동자들을 거들고 나섰다. 보수파 조지 펠 추기경은 호주 국영 ABC-TV를 통해 "존 하워드 정부의 일방적인 노사관계법 개정 시도는 문제가 있으며 사회적 저항에 부딪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교회협의회는 지난 6월29일 성명을 발표, "노동자의 인간 존엄성이 훼손되는 노사관계법 개정에 반대한다"며 "교회는 호주노동조합의 반대 캠페인에 적극 동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천주교, 성공회, 유나이팅 처치(감리교, 일부 장로교 등의 연합체) 등이 참여하고 있는 전국교회연합회는 그동안 보수적인 기조를 견지하며 하워드 정부를 지지해 왔다.

▲ 헤럴드 폴 여론조사 결과
ⓒ 호주노동조합
한편 7월 4일 시드니모닝헤럴드가 발표한 '헤럴드 폴' 여론조사 결과도 조사대상자의 60%가 노사관계법 개정안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찬성은 21%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잘 모르거나 중간적 입장이라고 밝혔다. 그 다음날 발표된 AC닐슨 여론조사의 결과도 자유-국민 연립당과 존 하워드 총리의 지지율이 10% 정도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하워드 총리는 위와 같은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진작부터 예상했던 바"라며 "지금은 노동조합의 선동적인 거짓 캠페인 때문에 여론조사 결과가 그렇게 나왔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노사관계법 개정에 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라고 일축했다.

호주는 전통적으로 평등주의(Egalitarianism)와 동료애 정신(Mate Ship)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다. 약 200년 전, 망망대해에 떠 있는 '불귀의 땅(Never, Neverland)'에 식민지 국가를 건설했던 개척민들은 호주의 건국이념을 평등주의로 삼았으며, 지금도 평등주의는 호주의 국가이념이다.

국가의 모든 정책기조를 경제 우선정책으로 몰고 가면서 노동자의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위협하는 존 하워드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 전국교회협의회 사무총장 존 헨더슨 목사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비단 호주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 해당되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노동자는 경제적 소모품이 아닌 인간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호주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적인 가치가 경제적인 가치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호주가 노동자 천국이라고? 그건 옛말"
7월 1일, 타국에서 시위에 나선 한인노동자들

▲ 타운홀 집회실황을 시청하는 한인노동자들.
ⓒ윤여문
7월 1일. 호주노동자들의 메카인 시드니 서부의 관문이면서 한인밀집거주지역인 스트라스필드에 위치한 한 클럽에서 한인 노동자들의 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에는 주로 건설노조 소속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한인 집회는 타운 홀에서 생중계되는 NSW 주 노조연합의 집회실황 시청, 노사관계법 개정 반대 연설, 결의문 채택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스트라스필드 권기범 의원(노동당. 변호사)은 호주 노동계의 역사적인 사안들을 소개한 다음 "호주가 세계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국가여서인지 노동자의 지위가 급격하게 저하되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호주가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이어 "자본가들은 호주노동계가 지나치게 좌경화 됐다고 몰아붙이면서 최저임금제를 미국식으로 고치려고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대로 당하고 있으면 40년 전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이어서 등장한 시드니대학교 박사과정(노동문제)의 신준식씨는 "존 하워드 총리가 집권한 이후 빈부의 격차가 빠르게 심화됐다"며 "그럼에도 자유-국민 연립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게 된 것은 노동계 안에서조차 계층화를 조장해서 이간질시킨 결과다"라고 분석했다.

신준식씨는 하워드 정부의 이민정책도 비판했다. 그는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식이민자의 숫자는 크게 늘지 않았는데 457비자와 워킹홀리데이 비자 등의 임시비자 발급이 급격하게 늘었다"면서 "임시비자들을 통해서라도 한인사회가 커지는 것은 좋지만, 불안정한 신분과 과열경쟁 등을 활용해서 노동시장을 교란하려는 하워드 정부의 간교함이 그 이면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한인집회를 주관한 호주건설노조 강병조씨는 조만간 개정될 것으로 예상되는 호주노사관계법을 자세하게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은 결의문 채택을 제안해서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1. 호주노동자의 임금, 노동조건, 권리를 보호하자
2. 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노동조합과 조합원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공격을 무력화 하자
3. 법 개정안이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사실을 적극 홍보하자
4. 노동자의 일터에서 권리가 보장되고 공정 노사관계가 정착될 때가지 정당에 정치적 압력을 넣자

덧붙이는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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