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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550리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 탐사대원들, 그들은 고통속에서 우정을 키워나간다.
섬진강 550리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 탐사대원들, 그들은 고통속에서 우정을 키워나간다. ⓒ 서정일


지난 6월 24일 20대에서 50대까지 전국에서 100여명의 인원이 한꺼번에 블랙홀을 통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도착한 곳 섬진강, 5대강 중 유일하게 살아있다는 강 섬진강에서 7박 8일 동안 그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이리 돌아봐도 모르는 이들, 저리 돌아봐도 낯선 얼굴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다가온 생소한 풍경들, '섬진강 대탐사'라 쓰인 초록색 제복, 하지만 어떤 것은 헐렁하고 어떤 것은 꽉 낀다. 이리저리 맞춰보고 서로들 바꿔도 입어보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선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자신의 모습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베이지색 모자에 연초록 셔츠, 녹색 조끼는 길섶 자그마한 풀잎을 닮았고 섬진강 물속 피라미를 닮았다.

울긋불긋했던 운동장은 어느새 풀잎과 피라미들로 가득 차 자연과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높은 산 아래서 울퉁불퉁 바위틈 속 깊이 들어가 있는 계곡 사이에서 이쪽과 저쪽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넓은 강가에서 8일 동안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시작이다. 하지만 자연은 너무나 거대했다. 외로움인지 10여명 안짝의 소모임으로 모둠부터 구성한다. 그것이 첫 만남이다. 어색하지만 서로의 결속을 다짐하는 구호도 정해보고 모둠노래도 만들어 본다. 원시사회, 인간이 군집생활을 시작할 때도 아마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시간이 조금 지나니 어떤 이는 사회의 이력을 그럴싸하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 속에선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오로지 한 모둠의 생존을 위해 어떤 심성을 갖고 있는가에 더더욱 귀를 기울이고 힘듦을 감수하고 서로를 북돋아주며 550리 길을 낙오하는 이 없이 함께 할 수 있을 것인가로 상대를 저울질을 한다.

그러길 10여분, 어느새 서로에겐 보이지 않는 끈 하나가 연결된다. 외롭고 힘든 자연에서 만남이 사귐으로 변하는 순간은 순식간이다. 마음을 여는데 드는 시간이 이토록 빠른 건 이례적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웃음이 끊이지 않고 모임의 일원이 되기 위한 몸부림은 나이를 훌쩍 뛰어 넘는다. 자연은 마음을 열게 하고 순수하게 만드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노래한다.

새벽을 맞이하는 탐사대원, 자연앞에서 숙연해 지는 모습이다.
새벽을 맞이하는 탐사대원, 자연앞에서 숙연해 지는 모습이다. ⓒ 서정일

550리 강줄기는 끊임없이 고통을 부르고

삼시세끼 밥을 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서야 하고 불편한 천막 속에서 부대끼며 목욕하고 수십 명씩 함께 잠을 자는 것은 어찌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인디안밥' 수많은 손바닥이 대원의 등을 향해 쉼 없이 오르내린다. 깔깔거리며 웃다가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지 우격다짐으로 놀이를 다시 하자고 생떼를 쓴다. 불편함도 감수하려하고 세대차를 극복하려 애쓰는 아름다운 사람들.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고 사귐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져만 간다.

그리고 걷는다. 섬진강 발원지 전북 진안의 데미샘을 시작으로 550리 강줄기는 탐사대원들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요구한다. 첫 발자국에서부터 비틀거리는 사람들. 시작이기에 일상적인 가벼운 도보였음에도 데미샘으로 오르는 길에서 고통을 호소한다. 자연과의 사귐은 이렇듯 어색하게 시작했지만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포근한 엄마 품과 같아 금세 친해져 응석을 부린다.

새벽이다. 생각해 보면 7박 8일 동안 새벽은 늘 그 자리였다. 하지만 천근만근 무거운 대원들에겐 날마다 다른 새벽이다. 이미 발바닥은 물집이 잡혀 불이 났고 종아리는 자꾸만 당겨온다. 비를 흠뻑 맞아 몸은 균형을 잃고 절룩거리며 뒤따르던 대원들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어느새 앰뷸런스엔 단골손님까지 생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군, 고된 생활은 저마다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대열은 슬그머니 흐트러진다. 개인 행동이 늘어나는가 싶더니 진행요원들의 목소리가 높아간다. 사소한 의견차는 응어리를 만들고 침묵으로 이어진다.

결국 앰뷸런스에 의지했던 사람들은 대열로 돌아와야 했고 정신무장을 위해 걷는 속도는 더더욱 빨라진다. 모둠구호가 커지고 강해진 건 이때쯤이다. 갈등이 고통 속에서 생겼다가 더 큰 고통 속에서 말없이 수그러지는 이열치열 같은 모순, 그리고 이어진 열정의 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마음속에 남아있던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깨운 건 그날 밤 조별 장기자랑과 초대가수의 공연시간. 힘껏 소리치고 맘껏 뛰던 그들이 굳게 잡은 손은 갈등을 뛰어넘고 있었다.

섬진강에서 발견한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현장에서 문득 강물이 두만강에서 흘러 한강을 지나 섬진강에 닿았고, 힘차게 거꾸로 거슬러 오르고 있는 대원들의 구릿빛 모습은 동서의 화합, 남북의 화합으로 이어지고 자연과 인간의 화합으로까지 힘차게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징검다리를 건너고 섬진강 바위를 관찰하고 물맛을 보며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8일간의 여정은 어느새 섬진강의 모래가 되고 다슬기가 되어 녹아든다.

"자연을 보호하려는 여러분의 힘찬 행진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이성웅 광양시장은 힘들게 걸어온 지난 8일 동안의 긴 여정을 되새기며 대원들 하나하나를 챙긴다. 어느새 섬진강의 끝자락 광양 땅까지 와버린 대원들.

어색한 만남, 그리고 아쉬운 이별

지나온 시간들은 소중했다. 전라도 땅을 지나는가 싶으면 어느새 경상도 땅에 와 있고 20대 청춘의 뜨거운 손을 잡고 있는가 하면 50대의 거칠고 강한 손을 잡기도 한다. 앞에서 끌어주다가도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을 발견하기도 했던 섬진강 550리 길. 제1기 탐사대원 100여명은 그렇게 섬진강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리고 찾아온 아쉬운 이별.

어색한 만남으로 시작해서 마음을 열고 사귀었고 힘든 고통의 순간에 서로들 갈등을 겪어야 했지만 막상 헤어지려하니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있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지낸 7박 8일, 섬진강에 멱을 감고 섬진강둑에 발을 묻어 내가 자연이요 자연이 나라고 생각했던 시간들.

오로지 발 하나로 경상도와 전라도를 봉합하고 대원들간 30여년이 넘는 세대차를 극복했다는 의미 있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셔츠에 굵은 매직으로 석별의 정을 한 올 한 올 적어나가다가 '잘 가세요'라는 말을 적을 땐 울컥하는 마음에 잠시 머뭇거리는 사람들. 이별의 밤은 너무 짧았고 할 얘기는 너무나 길고 많았다.

밤이 깊었나 싶더니 어느새 새벽이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자마자 긴 잠에 빠진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잔상들, 섬진강은 어느새 사람으로 변해 내 친구가 되고 내 애인이 된다. 꼭 껴안고 노래를 부른다. 헤어지기 싫어 흘리는 섬진강의 눈물은 조끼에 눈물 자국을 남긴다.

"꼭 다시 돌아올 거야."
"꼭 다시 돌아……."

그러다 눈을 뜨니 높은 빌딩숲 질주하는 자동차 그리고 현란한 간판들. 지난 시간들이 꿈속 같다. '그래 꼭 다시 돌아올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떠올리는 섬진강, 이번 탐사에 참여한 모든 대원들의 가슴속에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제1회 섬진강 대탐사

홈페이지: www.sumjin.co.kr
일정:2005년 6월 24일~7월 1일
행진구간: 전북 진안 ~ 광양 / 총 550리 212km

주최: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시의회, 섬진강환경행정협의회
주관: 푸른전남21 (푸른광양21), 전남, 전북, 경남울산지구 청년회의소
탐사대장: 이성웅 광양시장, 남기호 광양시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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