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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사원 딱지떼기에 나선 선양주조(주) 직원들의 힘찬 출발. 앞줄 왼쪽부터 고봉훈, 이용우, 문기숙, 신경현씨
수습사원 딱지떼기에 나선 선양주조(주) 직원들의 힘찬 출발. 앞줄 왼쪽부터 고봉훈, 이용우, 문기숙, 신경현씨 ⓒ 윤형권
"10km를 완주해야 '수습'을 떼고 정식사원이 된다."

충청권의 대표 소주회사인 선양주조(주)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수습과정을 3개월 정도 거친 후 10km를 완주하는 사람에게 정식사원의 자격이 주어진다. 지리한 장맛비가 제법 굵은 빗방울로 후두둑 떨어지는 지난 3일 일요일 아침 6시 대전 갑천의 만년다리 밑.

선양주조(주) 수습사원인 이용우(30), 고봉훈(27), 신경현(30)씨는 '수습딱지'를 떼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세 명은 지난 5월 수습사원으로 들어와 3개월 정도 근무하고 있다.

이씨는 소주의 맛과 향 등 주질(酒質)을 책임지고 있는 대전시 오동의 선양주조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평소에 운동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가끔 헬스클럽에서 달리기를 좀 했다고 한다. 콧날이 우뚝한 것으로 보아 고집이 있어서 기권하지는 않을성 싶다.

고씨는 100㎏이 넘는 거구다. 경영지원팀에 수습사원으로 입사하여 오늘 수습딱지를 떼려고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온 고씨는 씨름이나 역도로 하면 금방 수습딱지를 뗄 것 같은 생각이다.

신씨는 이씨와 고씨의 중간 정도 체격이다. 금테를 두른 안경을 쓰고 바지는 긴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왔다. 복장으로 보아 평소 운동을 하지 않을 듯하다. 신씨는 남부영업부에서 근무하며 애주가들과 어울리며 판촉 하느라 소주 마시는 게 일이다.

선양주조(주)는 소주를 만드는 회사라서 그런지 남달리 동료애가 강한 것 같다. 대개 남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사람과 마시는 술이 소주 아닌가?

빗줄기가 굵은 휴일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수습딱지떼기 의식'에 이 회사 조웅래(47) 회장, 김광식(55) 사장을 비롯하여 13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수습사원과 함께 10㎞ 완주를 하려고 준비하고 나왔다.

선양주조(주)에 마라톤 바람이 분 것은 지난해 12월 조웅래 회장이 회사를 인수하고부터다. 조 회장은 마라톤 마니아다. 지난 4월 보스톤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가볍게 완주할 정도의 실력. 선양주조(주)는 이미 '마라톤 수당'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회사. 대회에서 1㎞마다 1만원의 완주 및 기록 수당을 지급하는 프로그램은 조 회장의 아이디어다. 참 재미있는 별난 수당제다.

"선양주조(주)는 지금 마라톤 바람이 불고 있으며, 회사에 생기가 돌고 있다"고 이명규 홍보팀장이 은근히 회사 자랑을 한다. 아무튼 회사경영에 건강과 활력을 불어 넣는 참신한 아이디어는 비가 오는 휴일 아침 갑천변으로 기자를 불러냈다.

워밍업
워밍업 ⓒ 윤형권
달리기에 앞서 워밍업을 했다. 워밍업은 이 회사 마라톤 동호회 감독이면서 왕년의 여자마라톤 스타인 문기숙씨. 수습사원 3명을 비롯한 16명은 문 감독의 노련한 지도로 워밍업을 한 후 10㎞ 시작점에서 "출발"이라는 구호를 힘차게 외치며 빗속을 뚫고 달려갔다.

3㎞까지는 다들 잘 달렸다. 선두에는 역시 조웅래 회장이 섰고, 그 다음이 김광식 사장. 김 사장도 만만치가 않다. 청년들과 함께 뛰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오늘의 주인공들인 이용우씨, 고봉훈씨, 신경현씨도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신경현씨가 좀 마음에 걸린다.

신씨는 오늘 10㎞ 완주를 위해 어제 저녁 때 이곳 갑천에서 8㎞를 뛰었다고 한다. 평상시 운동을 하지 않는 신씨는 "아직은 젊은데 그깟 10㎞쯤이야"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막상 목전에 다가오자 도저히 마음이 불안해 어젯밤 부랴부랴 8㎞를 뛰었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반환점인 5㎞를 돌아서자마자 신경현씨가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수습사원 동료인 이용우씨는 날랜 걸음으로 선두그룹을 바짝 쫓아가고 있고, 거구인 고봉훈씨는 그 육중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중간 정도에서 잘 달리고 있었다.

조웅래 회장의 골인(노란색 러닝셔츠를 입은 분)
조웅래 회장의 골인(노란색 러닝셔츠를 입은 분) ⓒ 윤형권
여전히 조웅래 회장이 선두에 있고 김광식 사장도 쌩쌩하다. 고참 간부들이 오히려 신참 사원들보다 더 잘 달린다. '마라톤 수당' 프로그램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다.

수습사원 중 가장 먼저 골인한 이용우씨(회색 러닝셔츠 입은 중앙).
수습사원 중 가장 먼저 골인한 이용우씨(회색 러닝셔츠 입은 중앙). ⓒ 윤형권

수습사원 고봉훈씨의 골인 장면
수습사원 고봉훈씨의 골인 장면 ⓒ 윤형권
6㎞정도를 돌파할 무렵 아직 수습을 떼지 않아 '마라톤 수당' 맛을 못 본 신경현씨가 점점 뒤로 처지고 있다. 신씨와 같이 근무하는 영업부 선배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홍보팀의 이명규 팀장이 신씨의 앞에서 페이스 조절에 들어갔고 영업부 선배들은 뒤에서 독려의 레이스를 시작했다. 오늘 신씨와 함께 수습을 떼러온 동료인 이용우씨와 고봉훈씨는 저만치 앞서 나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

하필 이럴 때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져 가뜩이나 무거운 신 씨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잡아당긴다. '어젯밤 8㎞를 뛰는 게 아닌데 …' 신 씨는 후회했다. 그러나 후회한다고 어디 될 일인가? 물안개가 짙게 핀 갑천. 평소에는 유유히 흐르는 갑천이 아름답게 보이더니 오늘은 왜 이다지도 원망스러운가. 끝이 없이 펼쳐지는 갑천변의 물안개…….

이미 두 명의 입사 동기들은 눈앞에서 안 보인다. 두 다리가 꼬이기 시작한다. 바지도 물에 젖어 흘러 내려 가뜩이나 힘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수습과 정식은 하늘과 땅 차이. 호칭만 해도 그렇고 수당과 보너스가 본봉의 35% 정도는 차이가 난다. 신씨는 이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걸음이 한 번씩 바뀔 때마다 생각난다.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마치 갑천의 물안개처럼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이때 뒤에서 "야 신경현 이대로 주저앉고 평생 수습 달고 다닐래?"라는 불호령 소리에 정신이 퍼뜩 났다.

골인 지점까지는 약 2㎞ 정도 남았다. 문기숙 감독과 선배 2명이 벌써 10㎞를 뛰고 다시 신경현씨가 있는 곳으로 왔다. 선양주조(주) 선배들이 수습사원 신경현씨의 10㎞ 완주를 도우려고 총력을 펼쳤다. 어떤 선배는 뒤에서 박수를 치며 도왔고, 또 어떤 선배는 "하나 둘"하며 구령을 붙여가며 도왔다.

아슬아슬하게 수습딱지를 뗀 신경현(앞 줄 중앙)씨
아슬아슬하게 수습딱지를 뗀 신경현(앞 줄 중앙)씨 ⓒ 윤형권
7월의 장맛비는 갑천을 짙은 물안개 바다로 만들었다. 신씨는 골인지점을 5백여 미터 앞두고 희뿌연 물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30분 정도 먼저 도착한 회장님, 사장님, 선배님들이다. 골인지점 백여 미터쯤 왔을 때 박수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해냈다."

수습사원들의 수습떼기 행사로 10km완주를 함께 한 선양주조(주) 조웅래 회장을 비롯한 직원들
수습사원들의 수습떼기 행사로 10km완주를 함께 한 선양주조(주) 조웅래 회장을 비롯한 직원들 ⓒ 윤형권
선양주조(주) 수습사원 신경현씨는 이렇게 해서 평생 처음으로 10㎞를 완주하고 수습에서 정식사원이 되는 순간이다.

"오늘의 이 기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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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깎는다는 것은 마음을 다듬는 것"이라는 화두에 천칙하여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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