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며칠 전, 계절학기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다 오니 할머니께서 이러십니다.

"너희 학교는 괜찮냐? 광주는 난리 났다!"

무슨 소린가 했는데 텔레비전을 보니 MBC 드라마 <제5공화국>이 하고 있더군요. 아마도 광주민중항쟁이 벌어지는 장면을 보시고 현재 일어나는 일이라고 착각하신 모양이었어요. 할머니는 걷지를 못하셔서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시는데 그 드라마가 재방송으로 계속 나왔나 봐요.

나이가 아흔 가까이지만 치매는 없으신데 가끔 이렇게 헷갈려 하세요. 예전에도 꿈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신 모양인데 그게 현실이라고 착각하시고 며칠 동안을 끙끙 앓은 적도 있었어요. 아무리 그건 꿈이라고 말씀드려도 알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할머니가 믿으시는 대로 그냥 장단을 맞춰드리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할머니 그건 드라마에요. 현실이 아니에요!"라는 대답 대신에 "아니요, 저희 학교는 별일 없어요. 광주도 이제 별일 없을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광주도 이제 별일 없을 거라는 대답은 못 믿겠다는 눈치 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희 작은 아빠가 그때 계엄군에 잡혀가서 죽을 뻔하셨거든요. 저도 대략적인 이야기는 알고 있었는데, 최근에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되면서 들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때 작은 아빠는 군 제대를 하고 학교를 복학하기 전에 광주에서 학원을 다닐 때였다고 합니다. 마침 저희 이모와 외삼촌이 광주에서 자취를 할 때라서 같이 살았다고 하네요. 작은 아빠가 다닌 학원은 하필 광주 도청 앞 YMCA 건물에 있었다고 합니다. 계엄군들이 들이닥친 시간은 수업 중이었구요. 그때 도청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다 잡혀갔다고 합니다.

작은 아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모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엄마는 할머니에게 소식을 전했지요. 할머니는 부랴부랴 목포에서 광주까지 쫓아 가셨구요. 중간에 차량이 통제돼서 꽤 먼 길을 걸어서 가셨답니다. 힘들게 광주까지 갔지만, 계엄군에 잡혀간 작은 아빠의 소식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답니다.

그렇게 사흘을 애태우다가 발길을 돌리셨다고 하시네요. 마침 할아버지도 간암 때문에 오늘 내일 하시던 상황이라서 더 오래 있을 수가 없으셨데요. 목포까지 돌아오시는 길도 무척 힘이 드셨다고 하네요.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해남 가는 배를 타시고 해남에서 다시 목포로 오셨데요.

그렇게 집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병상에서 물어 보셨데요. 아들은 못 데리고 혼자 왔냐고... 소식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셨을 할머니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알 만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서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다행히도 작은 아빠는 계엄군에 잡혀 가신 지 한 달 정도 후에 무사히 풀려나셨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그 일이 있은 지도 25년이 지났지만, 그때 가족을 잃거나 혹은 잃을 뻔했던 사람들에게는 마치 어제 일어난 일 같은가 봐요. 저희 할머니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제는 할머니가 <제5공화국>을 보지 못하도록 무슨 수를 내야겠어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