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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에서 배를 타고 장강 위에서 3박 4일 보낸 후 삼협댐을 넘어 의창으로 갑니다.
중경에서 배를 타고 장강 위에서 3박 4일 보낸 후 삼협댐을 넘어 의창으로 갑니다. ⓒ 이승열

새벽 4시에 대전에서 출발한 그들은 이미 아침식사까지 마치고 여유 있게 공항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넉넉한 웃음의 30대에서 60대까지로 이뤄진 구성원들. 말꼬리가 늘어지는 고향 사투리를 대하니 여행에 대한 예감이 아주 좋다. 공항은 아테네로 떠나는 올림픽 참가 선수단의 환송 행사로 혼잡의 극치에 달해 있었다.

비행기에 탄 후에야 이번 여행의 구성원과 일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중국어 자원 봉사에서 만난 조선족 3세 출신의 신학교 유학생 강 선생의 안내로 이루어진 중국 여행이라 했다. 비행기 안에서 급하게 눈인사만 나눈 채 미리 메일로 받은 여행일정을 살펴봐도 영 어설플 뿐이다.

전에는 여행을 떠나기 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혹 하나라도 더 보려는 욕심에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많은 것을 넣고 떠나려 애썼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지만 ‘아는 것만 보인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선입견 없이 오감을 통해 일단 여행지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결국 그것이 옳았다.

중경까지의 비행시간은 세 시간 남짓했다. 단체비자를 발급받은 탓에 이름이 적힌 순서로 모두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왔으나, 강 선생은 영 나오지 못하고 있다. 30여분의 기다림. 한국에서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고구려 역사를 둘러싼 동북공정의 예민한 실체를 보는 것 같았다. 동북부 조선족 자치주의 사람이 한국을 거쳐 북경도 아닌 중경 오지에 왜 왔느냐가 질문의 요지이었다. 한국 친구들의 여행을 돕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정확히 확인한 후에 통관시킬 만큼 아직 우리에겐 생소한 동북공정이 그들에겐 이미 정확히 인지되어 있었다.

아담한 중경공항. 새 공항 건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담한 중경공항. 새 공항 건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 이승열

중경공항 앞 화단. 소박한 노란색 꽃이 화단을 가득 메웠다.
중경공항 앞 화단. 소박한 노란색 꽃이 화단을 가득 메웠다. ⓒ 이승열

3000천만의 인구와 면적으로는 세계 최대의 도시라는 중경공항은 작고 초라했다. 대전역사에도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서대전역사가 떠올랐다. 이미 중국으로 떠나기 전 몇 십 년만의 더위로 제한 송전과 인공 구름을 만들어 비를 뿌릴 만큼 찜통더위라는 현지 소식을 듣고 떠난 터였다. 무한, 남경과 함께 장강 유역의 3대 화로 속으로 막 들어온 것을 체감하는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대책 없이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1시간 남짓한 중경 시내까지의 이동을 위해 12인승 봉고차를 교섭했다. 200위안, 우리 돈으로 3만원, 물가에 비해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반바지에 윗옷을 입은 듯 만듯한 운전사가 12명의 어른과, 사람만한 가방 열두 개를 마구 구겨 넣었다. 봉고차 안에서의 숨통 막히는 더위가 벌써 화로 안임을 실감하게 된다. 사람과 가방이 차곡차곡 쌓여 고개조차 돌리는 것이 힘든 상황. 내 움직임이 옆 사람의 가슴을 압박하는 상황. 이기심 때문에 여름철에 다닥다닥 붙어 잔다는 양떼가 떠올랐다.

도시 전체가 기복이 심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산의 도시(山城)’으로 불리는 중경 시내는 심한 경사 때문에 중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자전거 행렬이 전혀 없는 곳이다. 강원도의 산골에 비유될 만큼 중국의 내륙 오지에 자리 잡았으나 현대식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세련된 멋쟁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운전사는 우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앞에 내려 주었다.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마음이 숙연해졌다.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마음이 숙연해졌다. ⓒ 이승열

1945년 9월. 민족사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전 기념사진을 찍은 계단. 그들의 환희를 되새기며 우리도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1945년 9월. 민족사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전 기념사진을 찍은 계단. 그들의 환희를 되새기며 우리도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 이승열

상해 임시정부 청사보다 12배 넓은 중경 청사. 손바닥만한 마당에 가슴이 아렸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보다 12배 넓은 중경 청사. 손바닥만한 마당에 가슴이 아렸다. ⓒ 이승열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의 일제의 탄압과 추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상해를 벗어나 마지막으로 임시정부가 세워졌던 도시가 이곳 중경이다. 해방되던 1945년 1월부터 9월까지 약 9개월간 사용된 임시정부청사는 상해 청사의 12배의 건물이라 한다. 실제로 보기엔 번듯한 호화주택 한 채만도 못한 옹색한 규모의 건물을 고대광실이라니… 당시에 겪었을 나라 없는 설움이 그대로 전달된다.

27년간의 여정을 마침내 마치고 광복을 맞아 환국하기 전 계단에서 찍은 임시정부 요인의 사진을 대하니 감회가 새롭다. 그들이 감격스런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던 그 위치 그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1995년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5개의 전시실을 돌며 중경대학 한국어과를 나온 연변 처녀가 서툰 우리말로 친절히 사진들을 설명해 주었다. 처녀의 뺨에 물든 복숭아빛 홍조가 문득 사진 속에서 튀어나온 듯 생생하다.

고층건물에 세련된 멋쟁이들의 도시 중경. 코끼리 코처럼 생긴 버스의 옆거울이 재미있었다.
고층건물에 세련된 멋쟁이들의 도시 중경. 코끼리 코처럼 생긴 버스의 옆거울이 재미있었다. ⓒ 이승열

강 선생이 한국에서 미리 부탁한 장강 유람선표를 받기 위해 떠난 동안 전자백화점을 구경하였다. 80년대 초반 대전에 처음 세워졌던 ‘신도백화점’ 수준이었다. 한류열풍이 이곳에도 어김없이 불고 있었다. 전지현과 김희선이 핸드폰을 들고 예쁘게 웃고 있었다.

국가 소속 공무원들인 이곳 전자 상가의 점원들은 손님을 맞을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낯선 표정, 낯선 복장의 이방인들이 어슬렁거리자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계단 앞에 퍼질러 앉아 각자 아는 언어로 의사소통을 시작했다.

의사소통이 어려우면 다시 동료를 데려오기를 수차례, 그들의 하루 일당이 5위안(한화 750원), 200L짜리 냉장고의 가격이 60만~70만원정도이니 한 푼도 쓰지 않고 3년 동안 저축해야 마련할 수 있는 고가품이라 했다. 5위안으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까 걱정했으나 사회주의 국가라 주택, 의료보험 등이 우리 체제와 다르기 때문에 삶에 그리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했다.

그들은 배고품을 호소하는 우리를 위해 중경에서 가장 맛있다는 장어 샤브전문점 '지지선어후이꿔'를 추천했다. 중국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예쁜 여선생님 친구와 함께 나타난 강 선생은 그동안의 우리의 성과에 만족한 웃음을 보였다. 중국에서 중국인을 안내할 수 있게 되다니, 대단한 한국인들이다.

번화가에 빨래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신문을 읽고 있는 중경 시민들. 비닐에 쌓여 비가 와도 끄떡없다.
번화가에 빨래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신문을 읽고 있는 중경 시민들. 비닐에 쌓여 비가 와도 끄떡없다. ⓒ 이승열

한국의 70년대와 2000년대가 공존하는 도시 중경. 거리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짐꾼들. 그들의 메마른 등에서 삶의 피곤이 묻어났다.
한국의 70년대와 2000년대가 공존하는 도시 중경. 거리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짐꾼들. 그들의 메마른 등에서 삶의 피곤이 묻어났다. ⓒ 이승열

덧붙이는 글 | -2004년 8월 6일부터 8월 13일까지의 여행기록입니다. 
-지명은 현지발음에 가깝게 쓰는 것이 원칙이나 개인의 여행기록이므로 제 식대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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