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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고등학교 2학년 때인 것 같다. 여전히 시험이 끝난 후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는 '단체 관람'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고등학생이라면 나름대로 일탈을 꿈꾸며 친구랑 어울려 영화를 보러 다니던 때가 아닌가. 그 시기에 우리를 솔깃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었으니 그 제목은 바로 <프리티 우먼>('귀여운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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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극장에서 추억을 만들어간다

보기만 해도 침이 질질 흐르는 잘 생기고 분위기 팍팍 풍기는 배우 리처드 기어가 나온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피아노 위에서 벌이는 키스신이 엄청 찐하고 멋지다는 소문이 이미 영화를 보고 온 친구들로부터 들려 왔다.

<프리티 우먼>, 미성년자 관람불가?

'야한 것'과는 거리가 먼, 딱딱한 학교생활에 싫증난 호기심 많은 사춘기 소녀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 할 솔깃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가 붙어 있지만 심각한 베드신도 없고 해서, 극장 측에서는 별 검열 없이 청소년들도 그냥 들여보내 준다는 확실한 정보까지 돌았다.

키도 좀 작고 보기에도 동안(童顔)이라 어린 티가 확 나는 바람에 온갖 '미성년자 불가'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던 나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접할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가슴 떨리도록 멋진 키스 장면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었으니 말이다.

▲ 영화 <프리티 우먼>의 한 장면.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이 된 장면 중 하나
결국 이 영화를 보기로 하고 한 친구와 야간 자율 학습 도망을 감행하였다. 선생님께 둘러댄 변명이란 늘 하듯이 '몸이 좀 피곤하고 아파서'라는 뻔한 거짓말이었고, 다른 반에 있었던 친구 하나는 '집에 제사가 있어서'라는 핑계로 '야자'를 빠질 수 있었다.

약간의 핀잔과 잔소리를 뒤로 하고 신나게 교문을 나선 그날, 영화는 너무나 환상적이고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할 만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나의 예민한 감수성을 자극했다. 나는 마치 리처드 기어처럼 멋진 남자와 연애를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영화 속에 몰입해 들어갔다. 친구들이 말했던 '피아노 위에서의 로맨틱한 키스신'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멋진 키스신이 되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영화가 끝나고 친구와 '벅찬 감동의 가슴'을 끌어안고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나오며 명장면을 읊어대던 중, 아주 익숙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몸 아프다고 집에 간다더니 이 영화 보러 왔냐?" 으으윽, 담임이다. 순간 뛰어서 도망을 갈까 고민도 했으나 이미 모든 현장이 발각된 상태에서 도망은 더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결국 선생님께 애교 작전으로 인사를 하며 "어, 선생님… 영화 보러 오셨어요?"라는 말을 겨우 건네고….

그 다음에 남은 일이야 교무실에 불려가 엄청난 잔소리를 듣는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다. 선생님은 '쪼끄만 녀석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는 뭐 하러 보러 갔냐, 너 다음부터는 어떤 핑계를 대도 야자 빼주지 않는다'는 둥의 온갖 협박을 늘어놓았고, 나의 행복한 영화 관람의 기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박탈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 영화를 보길 백 번 만 번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여전히 내 머리 속에 '피아노 위 키스신'이 최고의 키스신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궁금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이 오래된 영화를 다시 한 번 음미하며 보시길 바란다. 요즘처럼 영화 심의의 수위가 낮아진 때에 이 영화가 나왔다면 아마도 '중학생 관람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별로 야하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그 당시에는 어떻게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가 붙었지? 참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덕분에 당시 착하고 순진한 여학생들은 이 영화를 보고 싶어도 '미성년 불가'라는 거대한 장애물에 막혀 '야자 도망'과 같은 과감한 결단을 시도하지 못하고 기회를 놓쳤다는 풍문이 있다.

<쥬라기 공원>의 무시무시한 공룡들

유달리 겁이 많은 편인 나에게 최악의 영화 관람이자, 가장 민망했던 순간은 바로 <쥬라기 공원>을 볼 때이다. 스필버그 감독의 야심작인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며칠 전부터 미리 예매를 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남들이 다 보는 인기 상영작 대열에 영화 마니아임을 자부하는 나 또한 당연히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귀띔해 주기를 '화면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얘기에 콜라와 팝콘을 사 들고 앞에서 네 번째 자리에 떡 하니 앉았다. 여름이었는데도 시원한 에어컨에 무시무시한 효과음, 오싹한 공포 분위기 조성과 엄청난 대형 화면에 나타나는 공룡들의 모습까지, 더위를 말끔히 날릴 만한 대단한 영화이긴 했다.

허나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티라노사우루스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드는 장면이 문제였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나쁜 인간에게 공룡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 장면에서 괴물 공룡의 모습은 크게 확대되어 화면 앞으로 달려들게 설정되어 있었다. 그것도 큰 입을 무시무시한 괴성과 함께 갑자기 쩍 벌리면서 말이다.

나는 너무 놀라 '으아아악' 하는 괴성을 지르고 말았다. 내가 앉은 자리는 화면과 엄청 나게 가까운 특급 로열석이었으니 그 공포감은 다른 이의 몇 배에 달할 정도로 엄청났다. 물론 장면이 장면이니만큼 다른 관람객들도 함께 소리를 질렀음이 당연하다. 이 정도에서 끝이 났다면 이런 민망함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 영화 <쥬라기공원>에서 무시무시한 공포감을 조성한 티라노 사우루스 모형.
ⓒ 유니버셜필름
소리를 지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콜라 컵을 높이 들고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뿌려댄 것이 아닌가. 그 파편이 얼마나 튀었는지 뒤에 앉은 수십 명의 사람들로부터 원성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으아악 소리 이후에 들리는 소리란 '아, 차거!', '어, 누구야, 진짜!', '옷 다 버렸네, 에이 신경질 나!'와 같은 원성.

이후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뒤에 앉은 사람들로부터 날카로운 가시와 같은 눈초리가 내 뒤통수에 아주 따갑고 총총히 박히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다 끝난 후에도 사람들이 나를 노려보고 나가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었으니, 이 영화가 '공포로 여름을 시원하게 하는' 영화가 맞기는 맞았나 보다.

그 놈의 야맹증 때문에…

이후에 겪었던 민망한 일 하나를 덧붙이자면 어두운 곳에 가면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져 잘 보이지 않는 '야맹증' 덕분에 생긴 일들이다. 평소에도 이 놈의 야맹증 때문에 영화관만 가면 동행자의 손을 붙들고 더듬더듬 자리를 찾는 나. 개인적으로 조금 고통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 불편이 없어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낸다.

하지만 이 병이 영화관에서는 아주 민망한 일들을 불러 오곤 한다. 계단에서 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안내를 받지 않으면 좌석을 찾지 못해 헤매게 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니 말이다.

그 중에서도 좀 부끄러운 사건은 컴컴한 곳에서 나 스스로 자리를 찾아보겠다고 더듬거리다가 옆 사람의 신체 일부를 만지게 된다든지 하는 것이다. 특히 그 상대가 남자일 경우 '여자 변태'로 오인 받을까봐 영화 보는 내내 긴장하게 된다. 그 상대의 옆에 앉게 될 경우, 다리도 꼭 붙이고 앉고 팔도 앞으로 모으고 앉아야 오해를 줄일 수가 있다.

이 정도는 그래도 덜 민망하다. 최악의 사건은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시커멓게 보이는 현상 때문에 한 남자의 무릎에 털썩 앉아버린 일이다. 지금은 그때 본 영화가 어떤 영화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그곳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서 남의 무릎에 앉은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니 말이다.

애인과 함께였던 그 사람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날카롭게 째려보는 그 사람 애인과 실수를 겪은 상대방에게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니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화의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황당한 일을 겪은 그 두 사람도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영화관에는 이처럼 실수에 얽힌 추억도 많다. 컴컴하고 좁은 공간에서 커다란 화면을 바라보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간접 경험하는 우리들. 쉽고 흔하게 우리가 찾는 영화관에 오래된 추억과 빛바랜 사랑과 실수로 인한 웃음이 머무른다. 그 추억이 좋아 영화관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극장전> 공모글로 '초보 연인들은 왜 극장에 갈까?'라는 부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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