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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한 살구가 노오랗게 익으면 2모작 모내기가 한창일 때입니다. 모내기하면 꼭 가져다 준 댁이 있었습니다.
시큼한 살구가 노오랗게 익으면 2모작 모내기가 한창일 때입니다. 모내기하면 꼭 가져다 준 댁이 있었습니다. ⓒ 김규환
작년 요맘때쯤엔 노랗고 새콤한 살구를 모내기하면서 기분 좋게 먹었다. 거진 모심기가 끝나는 시기는 6월 25일 전후였다. 간혹 다랑이 천수답(天水畓)만 장마가 시작되면 서둘러 일소를 황급히 몰아가서 식구끼리 비를 맞으며 꼽고 오는 게 당시 농사였다.

여느 해 같으면 벌써 2모작 모내기가 끝나고 대마 삼 껍질이나 칡껍질을 벗기고 콩밭으로 달려가 김매기를 하며 가족끼리 천렵을 하여 어죽을 끓여먹으며 해찰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마가 곧 시작되니 모내기를 하지 못했더라도 큰 걱정이 아니었지만 폭염이 내리 쬐는 못자리에선 모들이 옮겨달라고, 더 이상 이런 환경에선 못살겠으니 이사를 가게 해달라고 조르듯 한다. 하지만 1979년 초여름엔 곧 온다던 비도 6월말을 넘길 때까지 오지 않았다. 모가 두어 자는 커보였다. 자칫 이 때를 놓치면 모판에서 이삭이 팰지도 모른다.

가뭄 때 농심(農心)은 아저씨 갈비뼈처럼 메말랐습니다. 웃텅을 벗은 분은 아직 살아계실까 모르겠네요.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랍니다.
가뭄 때 농심(農心)은 아저씨 갈비뼈처럼 메말랐습니다. 웃텅을 벗은 분은 아직 살아계실까 모르겠네요.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랍니다. ⓒ 신안군
타작을 하지 못한 보리더미에 새파란 싹이 돋아날 때지만 오랜 가뭄에 세상이 말라있다. 메마른 대지와 강렬한 태양은 사람들을 헉헉거리게 만들었다. 송광교통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기분 나쁘게 지나간다. 유리창이 시커메서 안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사람들 인정마저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었다. 모든 게 지칠 대로 지쳤다. 호박넝쿨도 축 쳐져서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매가리가 하나도 없던 나는 자라지 않은 풀을 벨 수 없어 꼴망태를 지고 버드나무 잎이나마 찾아간다.

보마다 말라 하얗게 드러났고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1모작 논은 거북등처럼 쫙쫙 갈라져 있다. 관정 하나 파놓은 게 없다. 사시사철 마르는 법이 없었던 샘물도 마르기 시작했다. 이러니 못자리라도 마르지 않도록 양철물동이와 물지게를 지고 물을 퍼날라 보지만 속수무책이다. 차라리 수렁논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모질게 가문 날이 지속되었다.

밭은 푸석푸석 먼지가 날리고 저 멀리 들과 산은 아롱거리며 쓰러질듯 하며 논과 냇가는 거북등처럼 쫙쫙 갈라지면 독이 오를대로 올랐습니다. 뱀들 천국이죠.
밭은 푸석푸석 먼지가 날리고 저 멀리 들과 산은 아롱거리며 쓰러질듯 하며 논과 냇가는 거북등처럼 쫙쫙 갈라지면 독이 오를대로 올랐습니다. 뱀들 천국이죠. ⓒ 신안군
하늘만 보고 흐르는 물만을 의지해 농사를 짓던 산골 들판은 민심이 갈수록 흉흉해졌다. 보릿고개를 간신히 넘긴 지 얼마인데 대체 올핸 무얼 더 바라며 맘대로 죽지 못하는 목숨을 이어갈까? 다들 딸린 식구가 열명 내외이니 호구지책으로 삼을 방도가 따로 없는 이때 논농사를 망친다면 과연 어찌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생각만으로도 숨이 콱콱 막혔다. 절박한 심정, 이때보다 더할까.

간혹 해거름에 보릿대를 태우면 연기가 남쪽으로 휘돌았다가 다시 남동풍이나 서풍으로 되돌아가고 마니 비를 기대하기는 애초에 글러버린 모양이다. 면장은 백아산 꼭대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게 사람들 마음을 다독여 줄 형편은 못 되었다. 마른 미숫가루를 입에 털어 넣자 된 기침 해소에 걸린 70대 할아버지 가쁜 숨소리처럼 숨쉬기조차 팍팍했다.

두레박, 용두, 양철동이, 물동이에 물지게와 바가지를 총동원해보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냥 있기 뭐해서 나간 것이고 살기 위해 뙤약볕에 나갔습니다.
두레박, 용두, 양철동이, 물동이에 물지게와 바가지를 총동원해보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냥 있기 뭐해서 나간 것이고 살기 위해 뙤약볕에 나갔습니다. ⓒ 장성군
그예 어제는 동네 아저씨 한분이 도깨비에 홀려 객사(客死)할 뻔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남의 일을 다니며 거들어 하루하루 연명하던 그는 마땅한 벌이가 없자 옆 동네로 목을 축이려고 신작로를 따라갔다. 거나하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고 한다.

저 멀리 칠흑 같은 밤 불빛이 하나 보이더니 이내 다가와서는 술꾼을 데리고 장난을 치더란다. 손을 잡고 논두렁으로 끌고 가더니 보릿대만 남은 논에서 씨름을 하잖다. 한판 두판 이어지더니 어느새 열댓 판을 넘기고 있었다. 이젠 일본씨름도 하자고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하자는 대로 응수하던 아저씨에게 또 다른 제안이 있었다. 다름 아닌 모내기를 누가 더 빨리하는지 내기를 하잔다. 무논에 들어가 밤새 모내기를 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지 모를 일이었다.

한마지기를 거의 끝낼 무렵 날이 환하게 터왔다. 가까스로 술과 잠에서 깨어난 그이는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있었다. 길을 가던 동네사람이 발견하여 흔들어 깨워보니 반쯤 넋이 나간 사람이 되었다.

"어이 박샌 지금 여그서 뭐한당가?"
"으…도채비 이놈 나한테 왜그냐?"
"뭔소리여. 나란 말이시."
"요망한 놈 가만두지 않을 테다. 봐라 내가 모숭구기 이겼지?"
"허허 이 사람하고는…. 이놈의 날씨가 사람까지 잡는구먼. 어이 일어나더라고."

밤새 아저씨는 취한 건지, 뭐에 홀린 건지 평소 다니지 않던 참난쟁이 쪽 논두렁에 밤이슬을 맞으며 자다가 일어나더란다. 들길과 텅빈 마른 보리밭, 못자리와 마르지 않은 논을 오가느라 옷은 물론이고 얼굴까지 흙으로 범벅이었다. 손엔 나뭇가지 하나를 부여잡고 있었다.

내가 들은 도깨비는 참 괴상한 놈이었다. 여름철에 빈번히 출현하여 경계령이 내려지곤 했던 장난꾸러기는 집안 부엌에 있던 몽당 빗자루나 부지깽이에 혼백이 붙어 사람을 밤새 가지고 놀아 진이 빠지게 한다. 이런 때마다 늘 어른들은 우리가 손에 난 물사마귀를 죽이려고 피를 묻히면 "도채비가 붙은깨 조심혀라"하셨다.

그때까진 작은 동복수원지(댐) 하나로 공급받던 광주, 전남지역은 식수난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답니다. 80년대 중반 들어 저수량을 10배 늘리고 주암댐을 막으면서 물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명소였던 화순적벽이 잠긴 아쉬움이 무척 큽니다. 섬지역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먹을 물 받으러 나왔네요.
그때까진 작은 동복수원지(댐) 하나로 공급받던 광주, 전남지역은 식수난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답니다. 80년대 중반 들어 저수량을 10배 늘리고 주암댐을 막으면서 물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명소였던 화순적벽이 잠긴 아쉬움이 무척 큽니다. 섬지역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먹을 물 받으러 나왔네요. ⓒ 신안군
그날 오후가 되자 마을엔 박씨 아저씨가 도깨비에 홀려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메마른 대지에 비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에겐 여우비만도 못한 지나가는 소나기일 뿐이었다. 그 뒤론 며칠 동안 문밖출입을 못하고 누워있었다는 후문이 돌고 끝이었다.

"어디 가쇼?"
"글도 한번 나가봐야제."
"강주(광주)도 난리가 났다더만…."
"허기사 그럴 것이여. 봇또랑(봇도랑) 바닥이 하얗게 드러나부렀응께."
"살 만에 물을 중께 질러다(길러다) 먹을 수도 없고 죽을 맛이라더만. 섬지방은 배로 물을 실어 나른답디다."
"농사는 쫑쳐도 마실 물이라도 줘야지 원…."
"글게 말이시. 근디 우리가 지금 강주놈들 걱정하게 생겼는가?"

늘 어른들 손엔 논에 물을 잡아보려고 삽자루가 들려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정해진 순번은 없었지만 여차하면 으쓱한 밤에라도 물꼬를 돌려 자기 논에 물을 끌어와야만 하니 물 도둑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었다.

어린 아이, 학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불침번을 서듯 젖 뗀 아이까지 순서를 정하여 한번 댄 물이 다른 곳으로 돌려지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감시를 한다. 학교에 나와서도 졸던 아이들은 집에서 물꼬 지키는 일에 동원되었다. 형제들끼리 '후라시'를 들고 쪼그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당시 농촌지도소 직원이 새마을 모자를 쓰고나왔지만 뒷짐을 지고 있는 모양이 조금은 거슬리는군요.
당시 농촌지도소 직원이 새마을 모자를 쓰고나왔지만 뒷짐을 지고 있는 모양이 조금은 거슬리는군요. ⓒ 신안군
봇도랑을 따라 내려온 물을 들이는 행운은 그나마 며칠 동안 나풀거리는 헌 비닐을 수로에 놓고 흙과 돌로 물이 새지 않도록 몇 백 미터를 단속해야 한다. 사흘이 넘게 두어 마지기에 물을 대봤자 밤에 조금 뻗을 뿐 낮엔 땅으로 스며들기 바빴다.

어떤 이는 푸석푸석한 마른 논을 그냥 갈아 놓기도 한다. 산두(山稻 밭벼. 찰벼로 밭에 씨를 뿌려 경작하는 벼)라도 심어볼 심산이다. 7월 중순을 넘기면 모두 포기하고 메밀이라도 갈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땅속에 있던 습기라도 건져 올리자는 거다.

올핸 모질게 가물어 하늘로 날아가는 양이 더 많아 벌써 닷새째 헛수고를 하고 있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물을 잡아 모내기를 하는 게 인정이었지만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사람들은 이젠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는 한해 농사 끝장이 나고 마니 삽자루를 흉기로 삼기도 한다. 이럴 땐 장정이 된 아들 숫자도 한몫을 단단히 한다.

"시방 뭣들하자는 것이요?"
"지비는? 자네한테 할 만큼은 했네."
"왜들 이런다요 성님?"
"벌써 사흘 지났지 않은가? 이쯤 되믄 나도 더 이상 못 지달린당께. 물 좀 나눠 쓰자는데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안그냐 아그들아?"

기계화가 되면서 보리타작을 하던 발동기까지 동원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엔 경운기로 물을 끌어왔답니다.
기계화가 되면서 보리타작을 하던 발동기까지 동원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엔 경운기로 물을 끌어왔답니다. ⓒ 김규환
아이들은 아버지 성화에 고개를 끄덕인다.

"글지 마쇼 지발."
"안되아. 좋게 말헐 때 듣더라고."
"안 된당께라우."

이토록 말이 길어지면 삽자루가 오간다. 간혹 사촌끼리도 다퉜다. 막걸리 나누고 일손을 거들던 이웃간의 정은 온 데 간 데 없다. 모질게 배고프게 살아온 농사꾼들 인심은 그날만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악랄해져 낫으로 위협을 하는가 하면 삽 날로 실제 등짝이나 허리를 후려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입에 풀칠은 하려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오고 있음인가. 안개가 자욱할수록 날이 쨍쨍하기도 한다. 하지가 지난 지 며칠 째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목구멍까지 타들어가니 감나무 언저리에 깔따구와 하루살이가 날더니 바짝 마른 제비가 힘겹지만 동네 한바퀴를 즐겁게 순찰을 한다. 땅강아지도 보였다.

산골짜기 계곡까지 비닐 호스를 연결하여 물을 대서 농사를 지었답니다. 곳곳에서 이런 풍경을 만났던 시절을 잊지 마세요.
산골짜기 계곡까지 비닐 호스를 연결하여 물을 대서 농사를 지었답니다. 곳곳에서 이런 풍경을 만났던 시절을 잊지 마세요. ⓒ 신안군
푹푹 찌는 더위에 나를 따르던 강아지마저 혀를 쭉 내민다. 마지막 몸부림이다. 마당 한가운데 두엄자리를 파던 닭은 연신 골골거리며 목울대를 움직인다. 지렁이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개미는 밥을 물어 나르느라 바쁘다. 이제 끝이다. 스산한 바람이 한번 불더니 백아산(810m) 상봉에 구름이 몰려왔다.

"이녁도 봤는가?"
"뭐라우?"
"몰랭이에 비가 묻어온다말이시."
"흐미 인자사 비가 올랑갑소잉."
"비설거지해야 할랑갑소."
"아~들이나 모타놓더라고. 언제 또 그칠지 모른께 논에 꼽아놓기라도 할라믄 정신바짝 차려야혀. 알것제."
"하믄이라우."

사흘 동안 비가 쉬지 않고 왔다. 양동이로 붓듯 천정이 뚫린 듯 마구 쏟아지니 마른 논두렁 곳곳이 허물어져 방천 난 곳을 막느라 허둥댈 지경이었다. 속으로만 콧노래를 부를 뿐 엉덩짝도 붙이지 못했다. 비를 맞으며 우비를 입고 집집마다 논 갈고 모 찌느라 동네가 텅텅 비었다.

"아부지 핵교가야 허는디…."
"안 돼!"
"선상님께 말씀 올리고 올께라우. 조퇴라도 혀야헌디…."
"낸중에 야그하면 됭께 일이나 혀."

땅강아지 가지고 놀던 때가 언제련가. 비가 오기 전에 여러 곤충과 풀벌레가 바삐 움직입니다.
땅강아지 가지고 놀던 때가 언제련가. 비가 오기 전에 여러 곤충과 풀벌레가 바삐 움직입니다. ⓒ 김규환
일시에 쏟아진 비로 그 오랜 세월 아름답게 이어져온 품앗이도 물거품이 돼버렸다. 1모작 때 벌어둔 품이라도 내 코가 석자니 식구들끼리 모내기를 해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주말에 시작하여 난데없는 비가 쏟아지자 화요일까지 휴교령이 내려졌다. 어린 우리는 죽을 판이었다.

"아이구 허리야."
"야 이 놈아 허리도 없는 것들이 무신 소리여?"
"우리덜은 허리가 약헌게 글제라우."

오는 빗물을 마시며 비 맞은 젖은 밥을 먹으며 들에서 며칠간을 살았다. 저수지 하나 없는 산골짜기에서 농사짓기란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이 얼마 전이던가. 1981년 숙원사업이던 수리조합 송단제(松壇堤)가 3년여 공사 끝에 완공되자 그런 일은 먼 옛날이야기로 잊혀지고 말았다.

논에 모내기를 한 후로 80년대 초반까지 이랬으니 조상들의 노고는 말이 아니었다. 이젠 한 달여 빨라진 모내기에 1모작뿐이라 모진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벌써 요즘 들판 모는 뿌리박기를 끝내고 거뭇거뭇 짙어가며 푸르러지고 있다. 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가뭄이지만 살구 먹고싶은 맘은 여전하다.

우리 동네는 참 이상했습니다. 농업용 관정을 파 본 역사가 없답니다. 연탄도 때보지 못했지요. 나무만 때다가 곧바로 석유보일러를 이용한 궁벽한 곳이었습니다.
우리 동네는 참 이상했습니다. 농업용 관정을 파 본 역사가 없답니다. 연탄도 때보지 못했지요. 나무만 때다가 곧바로 석유보일러를 이용한 궁벽한 곳이었습니다. ⓒ 신안군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요즘 내년 귀향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산채원 山菜圓>을 만들기 위해 가평에 있는 <산채원시험포지>를 이삼일 새 다닌다. 매주 토요일 저녁 목포문화방송에 <시골뜨기 김규환의 잃어버린 고향풍경>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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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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