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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 그리고 말하는 것조차 힘겨워진다. 남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겨우 손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나마 수화라면 좀 나을 텐데 손바닥에 글씨를 써야 겨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니 대화라고 말하기도 안쓰럽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누구나 '절망'이라는 단어를 연상하지 않겠는가.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이름, 헬렌 켈러도 그러했을 테다. 1880년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1882년 초에 열병을 앓아 시력과 청력을 잃게 된 어린이, 말하는 것조차 힘겨워진 소녀, 누구나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 빠져든 헬렌 켈러도 필히 그러했을 테다. 하지만 지금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절망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보여준 '인간승리'의 기적 때문이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절망과 비애를 딛고 일어선 헬렌 켈러의 자서전으로 그녀가 보여줬던 삶의 의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중하지만 언제나 누리고 있기에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다.

모두 알다시피 그녀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도,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들의 천사 같은 미소도, 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의 발자국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와 가족들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보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상상할 수나 있을까.

그녀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고 한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첫날은 세상의 살아있는 사람과 동물들을 보고 둘째 날은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살펴보고 마지막 날은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볼 수 있어도 보는 듯 마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기에 충분하다.

그토록 바쁜 첫째 날에, 내 작고 아담한 집도 돌아보고 싶습니다. 내가 밟고 있는 양탄자의 따뜻한 색깔, 벽에 걸린 그림들, 집안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있을 친밀감 넘치는 장식물들도 보고 싶네요. 내 눈은 내가 읽은 점자책들 위에 경건하게 머물 것입니다. 그것들은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읽는 인쇄된 책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겁니다. 기나긴 밤과도 같았던 내 인생에서 누군가 읽어준 책과 내가 읽은 책은 인간의 삶과 영혼의 깊고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빛나는 등대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중에서-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 이어서는 그녀의 살아온 이야기가 사람들의 가슴 속을 파고든다. 사실 말이 쉬워 '인간승리'이지 어느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절망감에 빠진 사람에게 열심히 살라고 격려하기조차 어려운데 그 당사자의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그러나 그녀는 그 마음을 접었다. 쉽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녀는 그 마음을 접었다. 그리곤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에 나왔던 희망이라는 단어를 움켜쥐듯 어둠을 뒤로 하고 밝은 빛으로 발걸음을 뗀다. 그녀는 공부를 한다. 선생님이 손에 글씨를 적어주며 설명을 하면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듯 손바닥의 그 미세한 흔적들을 꼭꼭 가슴 속에 새겨 넣는다.

또래의 아이들은 아주 쉽게 읽으면서 공부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은 더 해야 했을 터이다. 마지막을 확신할 수 없는 그 상황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걸어가는 것과 같았을 테다. 주저앉고 싶은 순간도 많았을 테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주변사람들의 도움과 그녀 자신의 의지는 결코 그녀의 무릎이 땅에 닿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다시 일어서기를 몇 번이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온 돌부리에 치여 의욕을 상실했다 다시 추스르고 일어서기를 얼마나 반복했던가. 그렇게 터벅터벅 한 발짝 한 발짝 스스로 용기를 복돋우며 열심을 내 전진해 나아가 마침내 더 높은 곳에 올라 너른 지평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매번의 고투가 또 하나의 승리였다. 노력하면 할수록 빛나는 구름에 더 가까이, 푸른 하늘 저 멀리, 내 열망이 숨쉬는 고원에 한 발 더 가까이 닿을 수 있었다. -'본문' 중에서-

하늘도 그것에 감동한 것일까? 그녀의 의지는 그녀의 입에서 한 음절 한 음절을 발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상아탑의 입구를 열리게 만든다. 그녀가 고대하던 대학생이 된 것이다. 대학생이 되어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고, 문학의 세계에 빠지고, 마침내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던 그 소녀가 기적을 만든 것이다.

그녀의 기적은 성인들이 보여준 기적에 비하면 참으로 소박하다. 허나 인간의 힘으로 운명의 혹독함을 이겨낸 이 작은 기적이 다른 어느 것보다 더욱 인간적인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또한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 보고 싶은 책을 볼 수 있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일상의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주었기에 그녀의 이름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곳에서 기억되고 있을 터이고 사람들에게 빛을 던져주는 것일 테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삶의 빛이 퇴색했다고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노래가 될 터이다. 또한 주저앉고 싶은 이들의 어깨를 도닥거려주는 격려의 노래가 될 터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토록 원하는 것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축복의 노래가 될 터이니 어찌 그녀의 노래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내일 귀가 안 들리게 될 사람처럼 음악 소리와 새의 지저귐과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연주를 들어보십시오. 내일이면 촉각이 모두 마비될 사람처럼 그렇게 만지고 싶은 것들을 만지십시오. 내일이면 후각도 미각도 잃을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고, 맛있는 음식을 음미해보십시오. 모든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세요. 자연이 제공한 여러 가지 접촉방법을 통해 세상이 당신에게 주는 모든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영광을 돌리세요. -'본문' 중에서 -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

헬렌 켈러 지음, 신여명 옮김, 두레(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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