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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28사단에서 있었던 총기난사 사건 피의자 판결문. 가해자 박모 이병은 85년 4월 12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20년 전 28사단에서 있었던 총기난사 사건 피의자 판결문. 가해자 박모 이병은 85년 4월 12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 강이종행
최근 수류탄 투척과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28사단에서 20년 전에도 흡사한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새롭게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오마이뉴스>는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군사법원의 판결문을 단독 입수했다.

이 판결문에는 지난 85년 2월 24일 일요일 새벽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산리 28사단 화학지원대에 근무했던 박 이병에게 가해진 무차별적인 구타와 얼차려 등 폭행 내용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또 박 이병이 자신과 함께 근무하던 내무반의 사병들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댄 정황과 개인적인 감정 상태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게다가 사고 당시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장으로 돌변한 내무반의 처참했던 상황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충격을 준다.

당시 이 사건은 일요일 새벽에 벌어졌으며, 8명의 사망자를 냈고,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불만을 품고 내무반에서 잠을 자고 있던 동료들을 살해하는 등 최근 28사단 전방 GP에서의 총기 난사사건의 정황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판결문은 85년 4월 12일 28사단 보통군법회의, 85년 7월 4일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의 기록이며 각각 A4용지 16쪽, 3쪽이다. 박 이병은 1심과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86년 사형이 집행됐다. 직속상관인 최모 중사는 직무유기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은 박 이병이 사고를 저질렀던 직접적인 이유로 사고 전날인 85년 2월 23일, 위와 같이 구타와 인권침해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박 이병에게 가해졌던 구타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타자연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머리박기를 하는 도중 약 5회 구타당하고 말대꾸를 한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머리를 약 6회 구타당하였으며, 일석 점호 도중 손이 불결하다는 이유로 약 10분 정도 머리박기의 얼차려를 받게 되자 극심한 모욕감과 반발감을 느껴…."

다음은 판결문의 내용에 기초해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해 본 것이다.

판결문에 나온 박 이병의 직접적인 총기난사 이유. 박 이병은 사고 전날 밤 얼차려와 구타를 당했다.
판결문에 나온 박 이병의 직접적인 총기난사 이유. 박 이병은 사고 전날 밤 얼차려와 구타를 당했다. ⓒ 강이종행
1심 군사법정의 사형 판결에 대한 군 지휘관의 관할관 확인서. 당시 이00 소장은 1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1심 군사법정의 사형 판결에 대한 군 지휘관의 관할관 확인서. 당시 이00 소장은 1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 강이종행

구타와 인권침해에 총과 탄약 미리 절취

사고자 박모 이병은 28사단 화학지원대 보급병이었다.

판결문은 박 이병에 대해 "평소 화목하지 못한 집안과 가족들이 계속되는 불행에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과 좌절감을 느껴왔다"며 "허약 체질 때문에 각종 훈련이나 구보시 동료들에 비해 뒤처졌다"고 전하고 있다.

84년 9월 22일 입대한 박 이병은 보급행정병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참들의 계속되는 피복, 장비 등에 대한 무리한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부담감이 컸다. 이듬해 초에는 여동생의 대학 입시 실패 소식에 절망했고, 사회에 대한 반항심까지 가지게 됐다.

사건 전날인 2월 23일 밤 9시, 내무실에서 손모 병장과 김모 병장 등으로부터 구타와 얼차려를 당한 박 이병은 결국 고참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박 이병은 이날 밤 위병소 근무를 선 뒤 24일 새벽 0시10분께 탄약고에 보관돼 있던 M16 소총 2자루와 실탄 140발, 탄창 7개(탄창당 20발들이)를 몰래 빼냈다.

이날 새벽 5시55분까지 범행 실행 여부를 고민하던 박 모 이병은 김 모 상병으로부터 근무교대와 관련해 심한 질책을 받았다.

아비규환 : 보이는 대로 난사, 순식간에 피로 물든 내무실

박 이병은 1시간쯤 지난 새벽 6시50분경 마음을 굳힌다.

관물대에 있던 자신의 소총과 이미 절취한 소총에 탄창을 넣고 평소 가장 미워하던 김모 병장이 자고 있던 왼쪽 침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자동으로 놓인 M16에서는 총알들이 난사된다. 아비규환. 이후 복도에서 탄창을 교환한 뒤 다시 내무반에 들어와 위협사격을 하며 생존 병사들을 페치카 옆으로 모이게 했다.

양손에 소총을 든 박 이병은 도망을 가던 석모 하사와 박모 병장 등 3명에게 또다시 총을 쏜 뒤 내무실에 있던 나머지 병사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도망치는 동료들을 쫓아 상황실 문 앞까지 달려가면서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평온했던 최전방 부대의 내무실은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피로 물들고 만다. 이 사고로 8명의 병사가 숨을 거뒀고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마지막 군 사형집행... 구타가 감내할 만하다?

박 이병은 곧바로 도주했고 결국 자수를 했다. 군사재판에 회부된 박 이병은 1심에서 살인, 살인미수, 상관살해미수, 군용물 절도, 항명, 직무유기 등의 혐의를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도 그 형이 그대로 적용됐다.

군재판부는 당시 판결문에서 "피고인만 가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지적 받은 병사들은 가끔 상급자로부터 가벼운 얼차려나 구타를 당해왔다"며 "범행 전날 피고인이 당한 구타도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실탄과 탄창을 절취 관물함에 은닉하는 등 범행준비 과정이 치밀하고 용의주도했다"며 "피해자들이 반항을 할 수 없는 기상시간 직전을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사형 선고 이유를 덧붙였다. 이밖에 고참 병사 외의 사병에게도 무차별 난사한 점, 생존 병사들에게도 부상 뿐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을 준 점 등의 이유를 들어 형을 확정했다.

박 이병의 형 집행은 86년 이뤄졌다. 군 관계자에 따르면, 이후 군에서의 사형집행은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어느 언론을 통해서도 한 줄 보도되지 않은 채, 박 이병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박 이병은 이상한 친구가 아니었다"
[인터뷰] 당시 재판 담당한 이기욱 민변 부회장

지난 85년 28사단 화학대대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인 박모 이병은 군사재판에 회부돼 다음 해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고등군법회의에서 이 사건의 재판을 담당했던 법무사(군판사) 중 한명은 이기욱 민변 부회장(변호사).

그는 22일 밤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굉장히 큰 사고여서 충격적이었다"고 심정을 밝힌 뒤 "나는 사형 폐지론자지만 피해자 규모가 너무 커 사형에 반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10년간의 군 복무 기간 중 사형을 확정한 것은 이 사건뿐이라고 한다.

그는 당시 "박 이병은 자포자기한 상태였다"면서 "자신의 잘못이 너무 커서 더 이상 살고 싶어하지 않고 생을 포기한 사병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그의 어머니와 누나가 울었던 기억이 난다"며 "가족들은 대법원까지 가서라도 (박 이병을) 살리고 싶어했지만 (박 이병의 의지로) 결국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 변호사는 "그 친구 이름도 생각나고 모습도 선명히 기억한다"며 "이상한 친구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최근 전방 GP에서 벌어진 총기 사건과 관련 "(사고를 낸) 김 일병이 왜 그랬는지 조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도적·군대 운영적 측면에서 종합적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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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동안 한국과 미국서 기자생활을 한 뒤 지금은 제주에서 새 삶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닌 밝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실천하고 나누기 위해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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