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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는 길에 오이를 따왔다. 비가 오지 않아 넝쿨은 두 뼘 남짓밖에 되지 않지만 옹골지게 물기를 빨아들여 제법 향을 풍기는 오이열매를 맺었다. 꼬부라진 물파스 같다. 내가 따먹을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한 오이가 고맙다.
벌써 두 개째다. 아내에게 갖다 주면 시원한 오이냉국을 만들어주겠지. 상추와 열무를 즐기다가 실한 열매를 보니 밭에 가는 즐거움이 더하다. 아이들에게 요모조모 설명해주고 잘 가꾸자고 했다. 밟지 말아야할 것을 구분할 줄도 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데리고 가는 이유다.
곡식들은 웬만해선 자라지 않는 반면, 풀은 봄부터 늦가을까지 보름주기로 바뀌는 절기마다 종류를 달리해가며 쏙쏙 돋아 올라 새 얼굴을 선보이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잡초는 참으로 대단한 놈들이다. 어찌 당해낼까.
이젠 드디어 바랭이 철이다. 빈 땅마다 넓은 엉덩짝을 쭉 깔고 버티고 있다. 힘도 세서 잘 뽑히지 않는다. 벌써 대여섯 차례나 김을 맸건만 속수무책이다. 쑥, 달개비가 귀찮게 하더니 이젠 명아주와 피까지 가만 두질 않는다.
농작물은 주인 발소리 듣고 자란다는데 실은, 얼마나 김을 자주 매주고 흙을 북돋워주느냐에 따라 달리 보답을 하는 것이리라.
비닐 조각 하나 걸치지 않고 예전 농법 그대로 호미 하나로 풀과 씨름하는 내가 한가로운 장난을 하고 있다. 주변 밭과 비교도 해본다. 정말로 자라는 게 더디다. 남들 고추는 벌써 무릎 높이를 넘어 엉덩이까지 커서 꽃을 피우고 대롱대롱 매달려 곧 툭 따서 된장에 찍어 먹을 만큼 자랐다.
내 육아 원칙에 따라 크고 있는 키 작은 고추는 보습과 보온 능력이 떨어져 이제야 뿌리박기가 끝난 듯 줄기에 생기가 돌고 터를 잡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왜 이 원칙을 고수하는가? 그건 너저분하고 나풀거리는 비닐을 들판에서 보기 싫기 때문이다.
곧 장마라 한다. 곰취, 곤달비, 곤드레, 취나물, 산마늘, 산부추, 당귀, 오갈피, 엄나무, 땅두릅, 참나물, 피마자 따위 산나물에 오이, 호박, 감자, 고구마, 옥수수, 고추, 가지, 상추, 무, 배추, 토마토, 콩, 파, 부추, 쑥갓, 들깨를 오밀조밀 심었다.
어제 말끔히 매줬으니 내 기분마저 가뿐하다. 막혔던 수채 구멍 청소를 한 듯 기쁘다. 그러나 이도 잠시겠지. 며칠 후 장마가 오면 온 밭을 점령하는 잡초들과 또 다시 전쟁을 해야 한다. 며칠 간 손 놓고 있어도 좋으니 그걸로 만족하리라.
서울에서 가평 유명산을 오가는 시간 반 거리가 결코 가깝지 않지만 이렇게 하는 데는 잡초를 잡는다고 제초제를 마구 뿌리는 사람에 대한 작은 항변이다.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차라리 농사를 짓지 말라고 하고 싶다.
풀씨가 생기기 전에 뽑고 베고 득득 긁으면 잡초와 싸움은 그리 어렵지 않으며 옛 농법을 되살리는 작은 실천이 '산채원'으로 가는 오솔길이다. 직파와 노지에 그대로 심고 유기질 비료를 자체 생산하며 보잘 것 없고 못생긴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겠다.
논두렁 밭두렁을 낫으로 베어 집에서 가져간 음식물과 썩히는 것도 퇴비자급자족을 향한 의지다. 어서 콩과 작물이 자라 해를 가려주면 몇몇 잡풀은 맥을 못 추련만…. 비닐만 쓰면 간단한 것을 200평 가지고 쩔쩔매는 내 신세가 아직은 가상하다. 더디 자라고 못 생겨도 맛과 영양, 건강에 좋다면 수고 좀 한들 어떠리. 노동하는 내 몸이 즐겁다 한다.
남거든 해강이, 솔강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 한보따리 싸다 줘야겠다. 올 봄 얼마나 뻥을 쳤는지 하지감자 캐달라고 성화다. 활동비까지 쪼개고 꽃밭을 남새밭으로 바꿔 유기농 식단을 마련하시겠다는 원장님을 돕는 길은 이 방법밖에 없다. 모금은 절대 사절하신다는 말씀이 있었기에 내가 할 일은 이것뿐이다.
이즈음 비 한번 와주고 장마철로 접어들면 좋으리라. 타지 않도록 적셔주면 쑥쑥 자랄 것인데 물 한 모금이 아쉽다.
덧붙이는 글 | <산채원 山菜園> 카페에 오시면 요즘 제가 사는 모양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요즘 귀향 준비하느라 바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