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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그곳에 칠순을 넘기신 장모님이 심고 가꾸는 밭도 있습니다. 도착해보니 감자가 줄지어 자라고 있었습니다. 장모님의 알뜰한 손길을 타서 그런지 감자 포기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감자 고랑 사이에는 아욱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옹기종기 모여서 탐스럽게 자라는 아욱의 모습에서 장모님의 살뜰한 손길이 느껴집니다. 감자밭 옆으로 옥수수며 콩도 하늘을 향해 활갯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모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밭에 계실 거라고 장담하던 아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막막해집니다. 갈 땐 가더라도 장모님이 가꾸신 밭 둘러보고 사진 몇 장 찍고 가자고 했습니다. 어디 가든지 사진을 찍고 싶은 얼치기 게릴라의 본성이 나온 것이지요.

밭두렁을 따라가며 감자 줄기도 찍고 옥수수 줄기도 찍었습니다. 아직은 작고 귀여운 콩 줄기도 찍었습니다. 장모님의 알뜰살뜰한 손길을 받아 자라고 있는 생명체들입니다. 뒤 따라 오던 아내가 좋은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 한 마디 했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아욱 뜯어 가자."

그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우리가 뜯어 가면 장모님이 다시 오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아내와 아욱을 뜯었습니다. 잘 자란 아욱 뜯어다 끓인 국 맛이 너무 좋아 '며느리 몰래 먹는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답니다. 오래오래 달인 아욱국을 생각하면 저절로 군침이 돕니다.

아내와 아욱을 뜯고 있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인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냥 바람소리는 아니었습니다. 밭두렁 너머에 누군가가 움직이는 소리였습니다. 아내도 그 소리를 들었나봅니다. 아욱을 뜯다 말고 무슨 소리 안 들리느냐고 물었습니다. 들린다고 했더니 아내가 바짝 다가서서 내 팔을 잡았습니다. 무섭다는 겁니다.

벌건 대낮에 뭐가 무서우냐고 큰소리를 쳤지만 찜찜한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눈 큰 사람 겁이 많다는데 우리 부부는 눈 큰 거로 따지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일어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내 팔을 꼭 잡고 아내도 따라왔습니다.

논두렁 아래 풀숲 사이에는 과연 한 할머니가 앉아 계셨습니다. 밭도 아닌 풀숲에서 무언가 열심히 손을 놀리고 계십니다. 곁에서 따라오던 아내가 그 모습을 보더니 펄쩍 뛰어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장모님이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 이기원

ⓒ 이기원

ⓒ 이기원
"엄마, 거기서 뭐해?"
"응, 왔어? 미나리가 한창이다."
"엄마, 뱀 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얼른 올라와."

겁 많은 아내가 아무리 성화를 해도 장모님은 미나리를 계속 뜯으십니다. 이미 뜯어 놓은 것도 꽤 많았습니다. 그래도 삶아 놓으면 얼마 안 된다며 많이 뜯어서 보내야 마음이 편하다고 하십니다. 장모님은 풀숲 도랑에서 미나리를 뜯고, 아내는 밭두렁에 서서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밤이면 저려오는 팔 다리 얘기, 요즘 들어 부쩍 건강이 안 좋아지신 장인어른 얘기, 모내기를 하려면 비가 조금은 더 와야 한다는 얘기, 암 치료받는 사돈 양반 안부, 준수 광수 학교 다니는 얘기 등이 오고 갔습니다.

미나리와 아욱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습니다. 아파트 주차장 곁 공터에 앉아 아내와 함께 미나리와 아욱을 다듬었습니다. 장모님은 다음은 미나리와 아욱을 신문지와 끈으로 묶으셨습니다.

ⓒ 이기원

ⓒ 이기원
아욱과 미나리를 다 다음은 후에 장모님은 한 줌 정도의 아욱만 남기고 다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밭에도 있으니 걱정 말고 가져가서 많이 먹으라는 것이지요. 아욱과 미나리 뭉치를 받아든 팔에 묵직함이 느껴졌습니다. 아욱과 미나리의 무게에다 장모님의 사랑과 정성의 무게가 더해진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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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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