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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목숨>
책 <목숨> ⓒ 천년의시작
병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다른 이들과 차별되는 삶을 산다는 것처럼 슬픈 인생도 없다. 병을 가진 자가 받는 숙명적 고통을 건강한 사람들이 어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슬픈 인생도 다양한 삶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박진성의 시집 <목숨>은 고치기 어려운 병을 안고 살면서 시인이 겪는 온갖 심적 괴로움과 고뇌를 시적 언어로 표현한다. 시집의 서문에서 시인은 '내 목숨은 병과 함께 나아가겠지만, 내 시만은 골병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로 간절한 소망을 전한다. 그만큼 그의 시는 치열한 삶의 기록이자 상상력의 산물이며 병을 안고 사는 한 인간의 적극적 표현물인 것이다. 병과 싸우는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시만큼은 병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 마음속에는 어찌 보면 자신의 몸 또한 병들지 않길 기원하는 애절함이 담겨 있다.

하지만 병마는 항상 시인 옆에 머무르고 그는 결국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서문에 적은 '이제 병은, 내가 싸워야 할 어떤 대상이 아니라 내가 끌어안고 동시에 내가 거느려야 할 뿌리임을 알겠다'는 표현을 통해 결국 그는 자신의 병을 감내하자고 결심한다. 그가 이처럼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이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작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96년으로 돌아가 자신을 회상하는 시 <대숲으로 가다>는 시인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심적 고통을 수용하고 시적 언어로 표현하게 되었는지를 잘 말해 준다.

"눈을 감으면 보였다 병원 근처 대나무 숲
또 밤이 오면 눈발이 대나무에 달라붙었다
나는 시인이 될 거야, 간호사들은 비웃었지만 나는
대나무에 달라붙어 옹이가 되었다. (중략)
나는 시인이 될 거야, 날카롭게 빛나는
주사바늘 끝에서 아침 빛다발이 쏟아졌다
또 밤이 오면 눈발이 침대에까지 쏟아졌다"

<대숲으로 가다> 중에서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시인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고통에 놓였던 예술가 고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듯한 시를 많이 썼다. <발작 이후, 테오에게>라는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생 레미 요양원에 있었던 고흐이기도 하다. 고흐의 동생에게 편지를 쓰는 듯한 서술 형태이지만 그 내용은 시인 자신이 겪는 방황과 불안을 담고 있다.

시인 스스로가 정신적 괴로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부르짖는 시도 있다. <나쁜 피>라는 제목부터가 시인이 겪는 온갖 고통의 단면을 보여 준다.

"오늘은 큰소리 내지 않겠습니다. 낙엽 지면 겨울나무 떼 지어 몰려옵니다. 의사 선생님, 기억을 지워주세요. 2월이구요. 강박적으로 새순 틔워내는 나무들 창문 틈으로 쳐들어오는데, 의사 선생님 기억을 지워야 해요. 현대 의학이 그것도 못한단 말입니까! 조용히 할게요, 뇌 일부분은 도려내도 괜찮아요.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나쁜 피> 중에서


어떤 기억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인은 나쁜 기억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적 분열을 겪고 있는 듯하다. 그의 병명이 정신 분열증이라는 사실은 시의 언어들을 통해 드러난다. 마치 1930년대 초현실주의 대표 시인 이상의 시를 보는 듯한 서술들은 시인의 불안감과 분열된 자아를 그대로 표출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시와 삶에 대한 그의 열정은 어느 누구 못지않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렬하다. 그래서 그의 시들은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표현들은 시인의 정서와 함께 시 속에 녹아 흐른다.

"심장처럼 파닥거리는 별빛을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네. 나는 노란색의 집으로 가서 숨죽여야 할 테지만 별빛은 계속 빛날 테지만. 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가 들리네 테오, 나의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져갈 수 있을까 트왈라잇 블루, 푸른 대기를 뚫고 별 하나가 또 나오고 있네"

<론강의 별밤, 테오에게> 중에서


시인 박진성이 겪고 있는 병이 치유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자신도 인정하였듯이 그와 병이 공생하는 수밖에 없다. 비록 병마에 시달리더라도 그의 시 <안녕>처럼 슬프고도 아름다운 언어적 표현물을 만들어내는 시인. 이 시집을 읽으면 그의 슬픔과 아련한 아픔이 독자의 가슴에 와 닿을 것만 같다.

"주치의 춘천으로 발령 나서/새 병원으로 찾아가는 길/잘못 나온 꽃잎 몇 개/안녕,/대기실에 앉아/아까 본 목련 꽃잎을 자꾸만 바라보는데/간호사 하나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라/허만하 시집 갈피 사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모래알./안녕이라고 애써 고개 파묻고 있었는데"

<안녕> 중에서


이 세상에 고통이 없는 영혼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겪기 마련이며 어떤 이에게 그 아픔은 엄청나게 클 수도 있다. 시인처럼 불치의 고통을 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시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누군가는 고통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한 채 그것을 안고 살기도 하지 않은가.

목숨 - 개정판

박진성 지음, 천년의시작(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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