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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인듯, 사자인듯, 원숭이인듯, 돼지인듯. 도저히 개라고 짐작도 할 수 없는 칠장사 검둥이
곰인듯, 사자인듯, 원숭이인듯, 돼지인듯. 도저히 개라고 짐작도 할 수 없는 칠장사 검둥이 ⓒ 이승열
주위의 입에 발린 꼬드김, 약간의 허영심(?)이 혼합돼 충동적으로 <오마이뉴스>에 여행기를 올리고 난 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CD 한 장에 용량이 찰 때마다 번호만 매겨 던져두었던 그동안의 사진자료들을 날짜별로 꼼꼼히 정리한다든지, 혹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올릴까봐 정보를 검색하는 기분 좋은 긴장감은 날 담금질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올 봄 알게 된 후 두 번밖에 다녀오지 않은 궁궐 같았던 남양주 흥국사는 간단히 일필휘지로 썼는데, 지금까지 수십 번은 더 갔을 칠장사는 날 무척 괴롭혔다. 역시 사람이든 사물이든 지나친 애정은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함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손을 보면 볼수록 더욱 엉망이 되어 가는 표현들, 매끄럽지 않은 문장.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그것도 사서 이 고생이람. 원래 열 꼭지 쯤 쓸 생각이었는데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굳게, 아주 굳게 결심했다.

그런데 그게 참 이상한 일이다. 메인 서브에 칠장마를 탄 꺽정의 늠름한 모습이 뜨고 조회수가 올라가고…. 이건 마약과 비슷하다. 결국 간신히 하루를 버티다 광대패를 따라 온 장길산에게 혁명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임을 가르친 운부대사의 청룡사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매년 안성의 절집을 순례하는 것이 초파일의 연례행사가 된 지 몇 년째, 작년엔 일정을 바꾸어 진천 농다리와 보탑사를 다녀왔다. 칠장사, 청룡사로 이어지는 안성 땅은 한나절이면 족한 가까운 곳이기에 하루가 통째로 주어진 이번 초파일에는 좀 욕심을 내 부석사라도 다녀올까 잠시 생각만 했다.

칠장사 이야기를 쓰고 난 후 KBS '무한지대 큐' 작가에게서 칠장사 앞 뻥튀기 아저씨에 대해 묻는 쪽지를 받았다. 아저씨가 올해도 칠장사 앞에 올 것인가, 얼마만큼 유명한 분이냐? 솔직히 잘 모른다고 했다. 게다가 작년에는 가보지 않아서 확실치 않다고. 전화를 끊고 나니 쓸데없는 책임감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 여행란을 통해 알게 된 제주의 관음사, 곁에 두고도 알지 못해 지나쳤던 운주 화암사가 준 감동과 고마움. 내가 쓴 여행기를 보고 여행을 떠날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다시 칠장사로 떠났다. 언제나 칠장사나 청룡사를 염두에 두고 떠난 길이라 횡하니 지나친 안성 죽산 땅을 꼼꼼히 살피니 내가 고스란히 박물관 속에 들어와 있다.

박물관 속으로의 여행, 일죽나들목 근처 국도에서 채 10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 있다
박물관 속으로의 여행, 일죽나들목 근처 국도에서 채 10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 있다 ⓒ 이승열
일죽 나들목에서 근처 38번 국도변 채 10m도 채 안되는 봉업사터에 우뚝 선 당간지주. 당간지주 사이로 보이는 오층석탑과 오월의 푸른 신록, 본래 있던 곳이 어디인지조차 모를 죽산리 석불입상, 석불 입상 옆 흩어진 석재들을 모두 모아 얹어도 이층 밖에 되지 않는 석탑. 이곳이 바로 불국토였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지 56억년 몇 천 년 후 부처가 될 미륵의 땅 안성. 매산리 태평미륵, 자신을 환생한 미륵불로 칭하며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기솔리 궁예 미륵. 만년서생 허생이 어느날 홀연히 책을 덮고 준비한 만냥으로 선택한 곳이 왜 안성장이었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죽산리 석불입상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새로 생긴 듯한 현대식 건물인 송강사. 저마다 염원을 담고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러 온 불자들로 작은 법당 안이 가득하다. 법회가 끝나면 공양을 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 무작정 기다린 시간이 한 시간여. 애고 주지스님이 교장 선생님 출신인가 보다. 한번 잡은 마이크가 끝날 듯 끝날 듯 끝이 없다.

자갈밭 위에서의 식사. 일곱가지나물에 가마솥으로 지은밥, 잡채, 묵무침, 두부조림, 아욱국 왠만한 한정식집보다 훌륭한 점심공양
자갈밭 위에서의 식사. 일곱가지나물에 가마솥으로 지은밥, 잡채, 묵무침, 두부조림, 아욱국 왠만한 한정식집보다 훌륭한 점심공양 ⓒ 이승열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려진 진수성찬을 대하니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보람이 있다. 작은 규모의 절일수록 대접이 좋고 공양음식이 푸짐한 법이다. 신도도 아닌 주제에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 있는 스님이 된 것 같아 조금 염치없지만 부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성찬을 즐긴다. 내년에도 꼭 들러 점심 공양을 해야겠다.

칠장사가 있는 극락마을 표지판. 식민지 시대 의도적으로 사용한 '부락'이 아직도 존재한다.죽산면장님.표지판 좀 빨리 고쳐 주세요.
칠장사가 있는 극락마을 표지판. 식민지 시대 의도적으로 사용한 '부락'이 아직도 존재한다.죽산면장님.표지판 좀 빨리 고쳐 주세요. ⓒ 이승열
산 그림자가 주차장까지 내려온 시간에 다시 칠장사. 찾으려 애써도 보이지 않던 절 입구의 부도밭을 눈 밝은 동생이 발견한다. 일년에 딱 하루 초파일에만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뻥튀기 아저씨를 얼른 찾아본다. 올해 안 오셨으면 전국적으로 거짓말 한 셈이 되는데. 주차장 맞은편 공터에서 온갖 종류의 뻥튀기를 늘어놓고, 트럭 위에서 연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2년만에 만난 뻥튀기 아저씨. 이번 칠장사 여행은 이 분과 촛불연등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
2년만에 만난 뻥튀기 아저씨. 이번 칠장사 여행은 이 분과 촛불연등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 ⓒ 이승열
작년에 걸렀으니 딱 2년만이다. 혹 방송국에서 인터뷰하자는 전화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손사래부터 치신다. 잘 나가는 사위, 딸 때문에 절대로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된다며 얼굴이 빨개지신다. 올해는 유난히 입구부터 자신을 찾는 사람이 많아 이유를 알아보니 <오마이뉴스> 기사 때문이라며 누군가 출력해 가져다준 내가 올렸던 칠장사 여행기를 보여주신다.

내가 그 글을 쓴 사람이라 말하자 선물로 가래떡 튀밥 한 봉지를 선물로 주신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 한 장 찍자 아무리 졸라도 꿈쩍도 안 하신다. 아저씨는 차 안 뻥튀기 기계 옆에. 막내딸은 트럭 뒤로, 곱게 화장한 아주머니는 모자로 얼굴을 가린 뒤 기념으로 찰칵 한 장.

비때문에 인연이 닿지 않았던 일곱 도적의 현신을 모신 나한전. 조금 과장하면 손바닥 만한 공간에 손바닥 만한 부처를 모셨다.
비때문에 인연이 닿지 않았던 일곱 도적의 현신을 모신 나한전. 조금 과장하면 손바닥 만한 공간에 손바닥 만한 부처를 모셨다. ⓒ 이승열
지난번 비 때문에 찍지 못한 나한전을 향한다. 600년이 넘은 나옹대사가 심었다는 소나무 아래 손바닥만한 나한전에 과자와 사탕이 수북이 쌓여 벌써 자루를 가득 채웠다. 유난히 조청 바른 유과를 좋아해 어사 박문수의 꿈에 과거시험의 시제를 정확히 알려줘 급제시킨 나한. 나도 마음속으로 내 염원을 얼른 빌어본다. 다음엔 수험생인 아들을 위해 꼭 유과를 챙겨 오리라 다짐해본다.

온 세상을 밝힐 촛불을 건네는 승과 속. 내 마음 속도 밝히고 싶다
온 세상을 밝힐 촛불을 건네는 승과 속. 내 마음 속도 밝히고 싶다 ⓒ 이승열

점점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부니 더욱 정성을 모을 수 밖에
점점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부니 더욱 정성을 모을 수 밖에 ⓒ 이승열
드디어 촛불이 빛을 발해 세상을 밝히는 시간. 세상 전체를 밝힌다는 정성으로 연등을 밝히라는 주지스님의 당부 말씀이시다. 나 하나도 어디 있나 찾지 못해 헤매는데 세상을 통째로 밝히라는 어려운 주문을 하신다.

바람이 자꾸 세차게 불기 시작한다. 촛불을 지키려는 갖가지 아이디어가 속출한다. 정다운 사람들끼리 모여 몸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양동이 속에 초를 넣기도 한다. 단연 우리의 종이컵 촛불이 인기라 금세 다른 사람들에게도 퍼진다. 어디 한 두 번 해본 솜씨인가? 촛불 밝힐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이다.

세찬 바람에도 결국 세상을 밝히는 등불은 타오르고
세찬 바람에도 결국 세상을 밝히는 등불은 타오르고 ⓒ 이승열

이 땅서 살다 떠나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있을 망자들을 위한 하얀등. 푸르름이 짙어지며 밤은 깊어갔다.
이 땅서 살다 떠나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있을 망자들을 위한 하얀등. 푸르름이 짙어지며 밤은 깊어갔다. ⓒ 이승열
어둠이 짙어지고 등불이 환하게 발하기 시작한다. 흰색 연꽃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 오색찬란한 연등은 현세 사람들을 위해서 불을 밝히고 있다. 조카 수련회에 가져갈 초를 두개 얻어 이미 초파일 달만이 빛나는 검푸른 하늘을 보며 산문을 나섰다. 써레질을 끝낸 논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다.

덧붙이는 글 | 청룡사의 비빔밥은 올해도 역시 맛있었습니다. 공양시간이 아닌데도 선뜻 챙겨주신 보살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청룡사에서는 동전지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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