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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버....
덴버.... ⓒ 배우근

또한 좋고 나쁨이 되풀이되듯 시작과 끝의 맞물림 속에는 진화와 퇴보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반복된다. 우리는 그 속에서 퇴보보다는 전진을 위해 멈추지 않고 걷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이 끝나는 곳에, 이번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에피소드 #31

덴버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오늘밤을 기념하기 위해 조촐한 파티를 열기로 했다. 자축연의 동반자인 '알코올'을 구하러 숙소 옆에 있는 잡화점으로 갔다. 적당량의 술은 딱딱한 이성을 말랑말랑하게 해주고 감정의 폭을 넓혀준다. 그 동안 쌓였던 긴장감도 한잔 술에 사라질 것이다.

덴버 시빅센터..
덴버 시빅센터.. ⓒ 배우근

잡화점에는 여러 종류의 음료수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정작 필요한 술이 보이지 않았다. 점원에게 물어보니 술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참 희한하다'고 생각하며 24시간 영업을 하는 주유소 편의점을 향해 어두운 밤을 뚫으며 차를 몰았다. 하바나의 한인타운 초입에 위치한 편의점에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도착했다. 손님은 왕, 보무도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배우근

수많은 상품 중에서 술을 저장해 둔 냉장고가 단박에 눈에 띈다.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진열되어 있었다. 어라, 그런데 냉장고의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다. 후진타오 중국주석을 한국의 대통령으로 알던 순진한 흑인 점원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곳은 자정이 넘으면 술을 팔지 않고, 새벽 5시가 지나야 판매를 시작한단다.

앗, 무슨 소리, 이곳 사람들은 밤에 술을 먹지 않고 낮에 술을 먹나? 덴버가 바로 말로만 듣던 낮술의 도시인가? 나중에 알아보니 늦은 시간에는 술을 판매할 수 없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심지어 미국에는 술을 구경도 할 수 없는 금주의 마을도 있단다.

한잔 술로 쫑파티를 하려 했던 나의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빈 손으로 돌아가기가 뭐 해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오늘밤 욕구불만인 나의 마음을 아이스크림의 당분이 해소해 주길 바라며 술대신 씹어 먹었다.

참고로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이 가지고 있는 당분은 욕구불만을 완화시켜 줄 뿐 아니라 애정결핍 증세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심한 남녀구성비 불균형을 이루는 군대사회의 혈기왕성한 젊은 군인들이 초코파이를 보면 환장을 하는 이유가 확실한 증거이다.

에피소드 #32

ⓒ 배우근

마지막 원고를 송고하기 위해 노트북 자판의 엔터 키를 눌렀다. 마뜩한 느낌이 손끝을 타고 흘러든다. 그 동안 수없이 엔터 키를 눌렀지만 마지막 일을 마치고 누르는 엔터키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이제 끝이라는 시원함과 함께 섭섭함이 교차하면서 손끝의 감각이 새뜻하게 살아나고 자판의 엔터 키 또한 내게 할 일을 제대로 마쳤는지 중량감 있게 책임을 묻는다.

이제 콜로라도의 덴버를 떠나 LA로 간다. 그곳에서 마지막 며칠을 보낸 후 한국으로 귀국한다. 아득하게만 보였던 여행의 끝단을 마침내 찍고 돌아가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노트북을 열 것이고 다시 또 출발할 것이다.

에피소드 #33

덴버 교외...
덴버 교외... ⓒ 배우근

만전을 기해 완벽하게 사전준비를 하고 떠나는 여행에도 수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번 미국 출장은 별다른 준비와 기대 없이 시작했다. 덕분에 갓물난 물고기처럼 퍼덕거리기 바빴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망설임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준비 부족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하지만 준비를 많이 할수록 그에 대한 실패의 부담은 더 크게 다가온다. 또한 풍선처럼 부푼 기대만큼 실망의 소리도 커진다. 게다가 철저한 사전준비는 때로 고정관념으로 변질되어 사고의 다양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최소한의 준비만 한 채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가능한 편견 없이 사람을 만났고 발 길 닿는 대로 걸었다.

ⓒ 배우근

여행이 끝나가는 이 순간, 무엇이 나에게 다가왔고 무엇이 남겨졌는지 선명하게 알 수는 없다. 명확하지 않고 아스라하다. 거울을 볼 때 바싹 붙어서 보면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에 한 걸음 떨어져 바라봐야 하는 것처럼 여행길도 마찬가지다. 경험했던 다양한 것에서 한 걸음 벗어나 바라보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중에, 이곳에 남겨진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다. 지나간 세월만큼 이곳에서 보고 느낀 기억은 설핏해지겠지만 가장 중요한 무언가는 잔뿌리를 걷어내고 남겨져 있을 것 같다. 흐르는 시간만큼 가슴 깊이 침전되어 있는 그것을 건져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홈페이지 : www.seventh-haven.com (일곱번째 항구)

USA 에피소드, 그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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