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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일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당당하게 일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 이승열
잠실까지 가는 버스가 옛날 813번. 4천 몇 번으로 바뀐 지 1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까지 번호를 못 외운 채 느낌으로 버스를 탄다. 813번에는 여자 기사분이 운전하신다. 단정하게 입은 제복,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운전대를 잡은 당당한 뒷모습이 아름답다. 잠실에서 남양주까지 걸린 시간이 단 15분. 천원짜리 김밥 한 줄이면 점심으로 족하다. 흥국사로 향하는 동생의 운전 실력이 제법 궤도에 올라섰다.

지난 화요일 먹골 배꽃을 보러 갔다 막힌 차 때문에 한번 인연이 닿지 않았던 곳, 수락산 자락의 남양주 흥국사(흥국사#오마이뉴스), 북한산 자락 고양시에도 같은 이름의 절이 또 하나 있다. 서울 근교에는 봉○사, 흥○사, ○국사라는 절 이름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흥하게 한다' '무엇을 받든다'라는 의미로 조선시대 주로 왕실의 원찰 노릇을 한 절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불교를 철저하게 박해했던 조선 왕조가 왕자의 탄생이나 죽음 같은 대사 앞에서는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역설적이다. 세종을 위한 신륵사, 광릉 봉선사, 선릉의 봉은사, 융건릉의 용주사 등이 모두 왕릉 옆에서 능참사찰의 역할을 했던 절들이다.

수락산 남쪽 자락의 남양주 흥국사는 세속오계로 잘 알려진 신라의 원광법사에 의해 창건된 고찰로, 중종의 8번째 왕자인 덕흥대원군을 위한 능참사찰로 중수 복원하였다. 명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왕위에 오른 선조는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원당을 건립하고 명복을 비는 뜻에서 흥덕사라 부르던 것을 인조 때 다시 흥국사라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청이 다 벗겨진 단아한 일주문. 마음을 모으고 절로 가는 마음이 가볍다.
단청이 다 벗겨진 단아한 일주문. 마음을 모으고 절로 가는 마음이 가볍다. ⓒ 이승열
오월의 푸름에 쌓인 단청이 벗겨진 '흥국사' 단 세 자만 써 있는 일주문이 단아하다. 세속의 번뇌를 덕지덕지 묻힌 채 휭하니 차로 일주문을 통과하는 것은 절로 향하는 마음이 아니다. 일주문을 지나며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

이런, 일주문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전봇대가 일주문 옆에 당당히 서 흥국사의 또 다른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20세기 사람들이 남긴 또 하나의 부끄러운 유산이 잠깐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세상을 온통 노란색으로 바꾼 황매화가 절 입구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흥국사에서 처음 만나는 대방채. 건물에 쓰여진 부재도 조경도 예사롭지 않다.
흥국사에서 처음 만나는 대방채. 건물에 쓰여진 부재도 조경도 예사롭지 않다. ⓒ 이승열
흥국사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 대방채, 잘 지은 사대부가의 사랑채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왕실에서 파견한 목수와 석수가 왕실의 후원으로 지은, 사찰의 얼굴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기단으로 쓴 석재, 벽의 무늬, 뜰에 심어진 모란, 작약 등이 왕실의 후원으로 지어진 건물임을 실감하게 한다.

왕실의 귀한 손님들이 오면 이곳 대방채에서 맞았는데, 왕실의 안녕과 복을 위해 시주한 귀한 분들이 일반인들이 불공을 드리는 법당보다는 이곳 대방채에서 불공드리길 원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개인의 안녕과 행복은 모든 이념을 뛰어넘나보다.

수천개의 절을 폐사시키고 불교를 요설로 인식하던 조선시대의 지배층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절을 중수하고 엄청난 시주를 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처마의 겹침과 잡상이 궁궐에 온 듯하다.
처마의 겹침과 잡상이 궁궐에 온 듯하다. ⓒ 이승열

잡상을 앉힌 대웅보전의 지붕
잡상을 앉힌 대웅보전의 지붕 ⓒ 이승열
대방채뿐 아니라 대웅보전, 만월보전 등 흥국사의 모든 건물 역시 왕실 못지않은 화려함을 자랑한다. 지붕 위 추녀마루나 용마루에는 모두 잡상이 앉혀져 있다. 건물이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잡귀들을 물리치는 잡상은 궁궐에만 쓸 수 있었던 귀한 것이었는데, 이곳 흥국사 지붕에 잡상을 앉혔다는 것은 이곳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잡상 못지 않게 건물의 단청, 벽면의 벽화, 모두 왕실 못지 않은 화려함을 자랑한다.

육각형의 만월보전.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형태로 궁궐을 옮겨 놓은 듯 단청과 내부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육각형의 만월보전.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형태로 궁궐을 옮겨 놓은 듯 단청과 내부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 이승열
대웅전 위 만월보전 역시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육각형 건물이다. 건물 안 천정 역시 금박을 입힌 화려한 단청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약사여래상을 모신 건물 뒤편의 편액을 보면 주상전하, 왕비전하, 대왕대비전하를 위한 축원 판문이 걸려 있다.

만월보전의 약사여래상.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가피를 입는다 한다.
만월보전의 약사여래상.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가피를 입는다 한다. ⓒ 이승열
약사기도처로 널리 이름난 만월보전 약사여래에 대한 일화가 한 토막 전해진다. 건강을 잃은 태조 이성계를 위해 출가한 따님이 조성한 약사여래의 가피로 이성계가 건강을 되찾자 많은 신도들이 몰려들고 어느날 이 부처님이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한다.

얼마 후 시냇가에서 발견된 부처님을 모셔가려 아무리 힘을 합쳐도 요지부동이었다. 궁리 끝에 나라 안의 여러 절 이름을 대던 중 "흥국사로 가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꼼짝도 않던 부처님이 번쩍 들렸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만월보전의 약사여래께는 기도와 공양이 끊이지 않으면, 신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기도 드리면, 반드시 그 가피를 입는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 잠시 두 손을 모은다.

부엌문의 신장상. 걸출한 화승을 배출한 명성답게 단청, 벽화 모두 훌륭하다.
부엌문의 신장상. 걸출한 화승을 배출한 명성답게 단청, 벽화 모두 훌륭하다. ⓒ 이승열

장승이 지키고 있는 범종루. 하얀 물방울 무늬의 녹색 옷을 입은 장승이 웃음을 짓게 한다.
장승이 지키고 있는 범종루. 하얀 물방울 무늬의 녹색 옷을 입은 장승이 웃음을 짓게 한다. ⓒ 이승열
마당을 가로질러 한 구석에 있는 범종루 역시 상식을 뛰어넘는 건물이다. 종, 법고, 운판, 목어를 두루 갖춘 범종루 앞 기둥을 다양한 표정의 장승들이 지키고 있다. 이곳 흥국사가 근세 화승들의 본거지로서 금강산 유점사 같은 사찰들과 함께 손꼽히는 화승 양성소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전통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조선 말 이곳에서 수업한 화승들이 건국 각지로 나가 자신들의 걸출한 기량을 발현했다 한다. 수도꼭지에 조각된 장승. 절 곳곳에 그려진 훌륭한 벽화들, 부엌문의 신장상, 초보자의 눈에도 그 기량이 예사롭지 않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황매화 흐드러진 그늘에서 쑥, 돌나물 등을 뜯고 있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황매화 흐드러진 그늘에서 쑥, 돌나물 등을 뜯고 있다. ⓒ 이승열

흐트러진 황매화 아래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봄나물을 열심히 뜯고 있다. 100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4월 마지막 토요일의 열기가 곧 이곳을 온통 푸르게 덮으리라.

절을 나서는 길에 만난 스님의 낡은 자동차가 멈추더니 구경 잘 했느냐 물으신다. 이런 따뜻함과 넉넉함이 절 모퉁이에서 나물을 뜯어도 좋을 편안함을 만들고 있나 보다. 분위기가 비슷해 자매임을 한눈에 알아보신다. 다음 방문시의 공양을 약속하고 근처의 덕흥대원군 묘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덧붙이는 글 | 흥국사는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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