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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신사, 신궁현황
일제하 신사, 신궁현황 ⓒ 문화관광부

“1906년, 11월. 달성공원. 나이 어린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1학년들도 이곳에 설치된 신사 앞에서 허리를 숙여야 했다. 매월 2회 꼴로 20~30리길을 걸어서 참배를 해야 했고 발가락이 부르트면 상급생 등에 업혀서라도 이곳을 방문해야 했다.”

4월말 문화관광부 광복60주년기념 문화사업추진위원회에서 제공한 일제하 신궁, 신사는 총 1141곳이다. 이중 대구경북권을 보면 신사 6곳(대구, 김천, 포항, 안동, 경주, 울릉도)과 경주 등지에 설치된 작은 신사 46곳이었다.

그 중 대구신사는 1906년 현재 달성공원 자리에 건립되었다.

대구시 중구청에서 발행한 <달구벌의 맥. 1990>은 “1905년, 일본 수비대장 야마다 중위 등은 달성공원에 표목을 세워 황조요배전(皇祖遙拜殿) 건립터를 정한 후 1906년 11월 봉헌식을 했다. 이때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 1,500명이 신사건립을 위해 2천 5백여원을 기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달구벌의 맥>에서는 “대구시민들은 일제 총칼에 못 이겨 억지 참배를 했지만,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도리이(島居 ; 신사앞에 세워둔 돌문)를 부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해방 된 이후, 대구신사는 단군을 모시는 한 집단이 운용하게 된다. 일본 신을 모신 그 곳에 단군 신을 모시는 모순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대구신사는 우여곡절 끝에 1966년에 완전 철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이 물러간 ‘대구신사’, 단군신을 모시다

달성공원에 있었던 일본신사 (1930년대)/ 출처 : 달구벌의 맥
달성공원에 있었던 일본신사 (1930년대)/ 출처 : 달구벌의 맥 ⓒ 허미옥
당시 상황을 기록한 <영남일보 50년사>제 4장 기사로 본 60년대 편을 보면, 대구 신사 철거와 관련된 내용을 적고 있다.

“대구시는 66년 8월 13일 새벽 기습적으로 달성공원 안의 구 신사 건물을 헐었다. 이날 정오 이른바 천진전 안의 단군성조를 모신 제단 및 제물 등 일체의 도구가 철거되었으며, 본전을 둘러싼 건물들이 밧줄로 묶여 당긴 그레이더의 힘으로 무너졌다. (중략)

이날 철거에 앞서 대구시는 단군숭봉회측과 약 3시간 회담하여 합의철거를 모색했으나 숭보회 측이 숭봉회 건물과 부속 건물을 달성공원 안에 지어 달라, 담장을 쌓아 달라는 주장을 꺾지 않아 결국 교섭은 결렬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대구시에 의한 철거를 단행한 것이다.”


달성공원, ‘등롱’(등의 받침)으로 추정되는 흔적 남아있어

등의 믿받침으로  추정되는 돌조각 (현재 향토역사관 2층에 있다)
등의 믿받침으로 추정되는 돌조각 (현재 향토역사관 2층에 있다) ⓒ 허미옥
현재 달성공원에는 신사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대구신사 철거 이후 달성공원에 대한 관리권을 정부로부터 이양 받은 대구시가 1966년부터 일대를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성공원 향토역사관 2층 배드민턴장에는 신사 흔적으로 추정되는 작은 돌조각이 남아 있다.

지난 2일, 달성공원을 찾았다. 달성공원 향토역사관 학예연구사 변성호씨는 “신사 주변의 조형물 중 등의 믿밭침(등롱)으로 추정된다”라며 "‘海野武南’(해야무남)을 일어로 바꾸면 ‘우미노다께오’다. 신사 건립자금은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 1500명이 2천 5백여원을 거두었으므로 아마 ‘우미노다께오’는 기부자 중 한명일 것 같다"고 설명했다.

향토역사관 기획 : '근대엽서로 보는 대구 이야기'


☞ 일시 : 2005년 5월 17일 - 7월 3일
☞ 장소 : 향토역사관 제2전시실(달성공원 내)
☞ 입장료 : 무료
☞ 문의 : 606-6420-1

덧붙이는 글 | 허미옥님은 참언론대구시민연대 사무국장입니다.
자세한 문의 : 053-423-4315/http://www.chamma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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