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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산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
ⓒ 박도
우리의 유년은 아름답고 벅차다. 산과 들로 뛰놀던 봄 언덕의 아지랑이와 종다리의 노래가 우리들 성장의 자양이었다. 뒷산의 진달래는 우리의 친구이자 경이며, 삶의 한 모퉁이였다. 진달래는 봄의 전령사이다. 봄을 먼저 알려주는 것으로 매화와 강가의 버들강아지 그리고 개나리와 목련이 있다.

이른 봄꽃들은 긴 겨울의 추위와 북풍을 견디고 맨발로 봄의 언덕에 헤쳐 나오느라 잎보다 먼저 피어 꽃으로만 화사한 자태를 자랑한다. 봄꽃은 그 정아함에다 화사함이 어우러져 자못 슬프기도 하다.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정한이 있기 때문일는지 모르나 벚꽃과 같은 봄꽃의 화사함에도 그 지는 시간의 아쉬움으로 적이 애잔하기도 하다.

진달래는 우선 수많은 무리들의 합창으로 온 산을 물들이는 그 힘참과 그득함으로 우리를 봄 속으로 한껏 깃들게 한다. 진달래는 낙엽이며, 관목으로 우리나라 및 만주 지방의 산간 양지 바른 곳에 잘 자란다. 진달래는 이른 봄부터 온 산을 붉게 수놓아 봄의 정취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꽃이다. 꽃은 3~4월에 잎보다 먼저 피고 색깔은 약간 자줏빛이 도는 붉은색, 또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데 특히 꽃과 뿌리를 섞어 빚은 두견주(杜鵑酒)가 유명하다.

진달래는 봄 잎이 피기 전에 꽃이 핀다. 꽃 조각의 아랫부분은 서로 붙어 있는데 이것을 합생(合生)이라고 한다. 진달래는 우리나라 어디에나 나고 꽃밭을 만드는 일이 많다. 서울의 북한산 진달래 능선, 관악산, 남산 북쪽 사면에는 봄이 오면 진달래가 피어서 장관을 이룬다. 여수의 영취산, 창녕 화왕산, 춘천의 오봉산과 삼악산, 가평의 운악산과 명지산, 강화의 고려산과 낙가산, 홍천의 가리산 등이 진달래 군락으로 유명하다.

봄이 되면 잎도 나오기 전에 이 산 저 산에 지천으로 피는 진달래는 온 산을 붉은색으로 색칠하며 겨우내 잿빛에 움츠러들었던 우리의 눈을 확 틔게 만드는 색채의 반전을 가져온다. 진달래는 매화처럼 고고하지 않고, 동백처럼 황홀하지 않다. 진달래는 우리의 서정과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꽃이라 할 수 있다. 유년의 기억 속에 선연히 떠오르는 풍경 한 토막 그 눈물겹도록 배고팠던 시절 아버지의 나뭇짐 위에 한 아름 꽂혀오던 진달래 꽃다발은 우리를 긴 시간의 저편으로 데리고 간다.

옛적에 진달래는 슬픈 이야기의 꽃으로 알려졌다. 진달래를 두견 또는 두견화로도 불리며, 이는 두견의 피 때문이지만 어떤 이는 진달래꽃이 두견새 입 속 색깔에 닮아 있다는 이유라고 말하기도 한다. 두견새는 원조(怨鳥),두우(杜宇) 귀촉도(歸蜀道), 불여귀(不如歸) ,소쩍새, 접동새, 자규(子規) 혹은 망제혼(望帝魂)같은 다른 이름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두견화는 옛날 중국 촉(蜀)나라의 망제(望帝) 두우(杜宇)가 장인 별령(鱉靈)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나서 원통하게 죽어 두견이라는 새가 되어 봄이 되면 밤마다 이 산 저 산 온 산을 날아다니면서 불여귀 불여귀(不如歸)하고 울부짖어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진달래꽃은 이렇게 피맺히게 울어대는 두견새가 흘린 눈물이 떨어져 핀 꽃이라는 전설에서 얻은 이름이라고도 하며, 두견새의 입 속이 진달래꽃처럼 붉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진달래는 그윽한 사랑의 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헌화가에는 신라 33대 성덕왕 때 수로 부인이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는 남편 순정공을 따라 가다가 절벽에 핀 진달래꽃이 너무 아름다워 수레를 멈추고 꽃을 따줄 것을 부탁했을 때, 마침 소를 몰고 지나가던 한 노인이 그 진달래꽃을 따서 헌화하는 얘기다. 아름다운 귀부인의 청을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할 때 한 시골 노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꽃을 꺾어 바침으로 은근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헌화가>
자주 빛 바위 끝에
잡고 온 암소 놀게 하시고
날 부끄러워 아니 하시니
꽃을 꺾어 바치옵니다.


▲ 진달래보다 더 붉게 피어나는 철쭉꽃
ⓒ 윤희경
진달래는 우리에게 이별의 정한을 나타내는 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초기 자유시의 꽃을 피운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만인이 애송하는 국민시라 할 수 있다. 소월의 빛나고 아름다운 시와 더불어 그의 쓸쓸한 생이 함께 한 그의 시 진달래꽃은 이별과 해후를 초월한 진정한 사랑을 노래한다. 가시는 임의 발길에 영변약산 진달래를 산화하는 깊은 애정과 우리 민족의 정한을 드러내고 있다.

<진달래 꽃>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또한 이별을 노래한 진달래의 노래로 미당의 귀촉도를 들 수 있다.
하늘 끝에 가신 님을 그리는 깊은 별리의 정을 노래한 명시다.

<귀촉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세조에게 밀려 왕에서 내려와 영월로 유배간 단종은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 해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자 처소를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겼다. 동헌 동쪽에 있는 누각을 자규루(子規樓)라 하며 이에 올라 두견새(杜鵑: 一名 子規)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 어느 달 밝은 봄밤, 단종은 누대에 외로이 앉아 무엇이 그리도 슬픈지 피나게 우는 두견새 소리가 자신의 신세 같이 비참하고 처량하게 들린다고 읊고 있다.

<자 규 시>

一自寃禽 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온 뒤로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 속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 (궁한연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소리 끊긴 새벽 묏 부리에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슬픈 이 하소연 어이 못 듣고
何乃愁人耳獨聽 (하내수인이독청) 어찌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듣는가


▲ 파란 하늘과 맞닿아 그 분홍색이 더 고운 진달래.
ⓒ 김정혜
그러나, 진달래는 많은 경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친근하고 정겨운 바로 우리 이웃에 산재한 꽃이며 삶이다. 진달래는 두견주와 화전으로 그리고 허기진 시절의 요깃거리로 우리 곁에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앞산과 뒷산에 온통 진달래가 피는 마을에 살고 있다. 화려한 꽃 대궐 안에서 살림을 하는 민족이라 우리는 그리 착한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육이오 전쟁이 끝나고 그렇게도 배곯았던 시절, 보리 고개 초입에서 허기지고 고픈 배를 채우고자 입 언저리가 새파랗도록 진달래꽃을 따 먹곤 했었다. 진달래가 지고 이어 피어난 산철쭉을 잘 못 알고 따 먹다가 배앓이를 하기도 했는데 먹을 수 있는 진달래는 참꽃, 먹을 수 없는 철쭉은 개꽃이라고 불렀다.

진달래꽃은 봄의 꽃 대궐의 주인처럼 산과들을 붉게 물들이며 우리의 젊음과 연인들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박화목은 사랑과 고향을 노래함에 진달래와 부엉이를 기억해낸다. 그의 망향은 한때 금지된 정지용의 고향을 대신하여 채동선 곡에 부친 60-70년대의 젊은이의 가슴에 메아리친 명가곡이다.

<망 향>

꽃 피는 봄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넘어
그 어느 산 모퉁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철따라 핀 진달래 산을 넘고
먼 부엉이 울음 끊이지 않는
나의 옛 고향은 그 어디런가
나의 사랑은 그 어느멘가
날 사랑 한다고 말해 주렴아
그대여
내 맘 속에 사는 이 그대여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것일래라


진달래는 그 피는 시기 4월이 갖는 역사적 의미로 분노와 자유와 열정의 꽃이기도 하다. 60년 4월 꽃처럼 산화한 젊은 영혼들의 사랑과 우정을 떠올리며 자유와 민주를 위해 흘린 고귀한 피를 연상하기도 한다. 그것은 20년 후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이 땅의 참 자유와 민주를 위해 헌화한 광주민중항쟁의 영령들의 이마쥬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진달래는 우리의 정과 삶이 어우러진 꽃이다. 할머니의 자상한 얼굴이며, 할아버지의 주름진 이마며, 아버지의 힘찬 삶이다. 어머니의 푸근한 사랑이며, 아내의 연분홍 웃음이다. 해마다 진달래가 피면 우리는 들과 산으로 길을 떠난다. 우리의 모습을 찾아, 우리의 역사와 정한을 만나러 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부모와 연인을 만나러 간다. 철따라 핀 진달래 산을 넘어 그리운 님을 찾아 우리는 달려간다.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다리에 힘줄이 생기도록….

<진달래>

어디쯤일까
내 기억의 저 어디쯤에서
햇살 눈부시게 비추고
종다리 힘차게 솟아오를 때

진달래
연분홍 진달래 바람에 하늘거리며
온 산에 불타고 있을까

다리에 힘줄 생기도록
힘차게 논두렁을 달리며, 달리며
냉이와 민들레의 밭길을 뛰놀 때

아버지 나뭇짐위에
빠알간 진달래 꽂고 힘차게 걸어오실까

어머니 냉수사발 들고 나가 맞으시며
햇살가득 진달래 웃음 웃으시던
봄날은 불타고 있을까

자란 후 눈물과 정한의 두견새 되어
젊은 순수와 열정의 분노되어
설렘과 기다림 되어
영취산 어디, 수유리 어디, 화왕산 어디
망향의 노래되어 울리고 있을까

장년의 내게는 아직도
영원한 고향의 뒷동산으로
어머니의 환한 미소로
주름 생기는 아내의 연분홍 웃음으로 피어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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