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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입구와 도로 곳곳에는 이처럼 이정표가 서있다.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입구와 도로 곳곳에는 이처럼 이정표가 서있다. ⓒ 김학수
그러나 개인이 살고있는 시골 농가주택에서 기르는 닭, 개 등이 무서워 일반인이 출입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이곳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여느 농가와 다름없다. 때문에 힘들게 찾아온 관광객들은 실망하며 되돌아가기 일쑤라는 것.

마을 골목 이정표 뒤로 보이는 집이 충무공 어머님이 사시던 곳
마을 골목 이정표 뒤로 보이는 집이 충무공 어머님이 사시던 곳 ⓒ 김학수
이 충무공 자당 기거지(李 忠武公 慈堂 起居地)로 알려진 이곳은 옛날 고음천(古音川 = 熊川)이라고 불렸던 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 1420-1번지에 있다.

이곳은 1591년 충무공이 전라좌수로 부임한 이듬해 왜란이 발생하여 충청도 지방이 전란에 휩싸이자 어머니(초계변씨.草溪卞氏1515~1597)를 이곳으로 모셔와(1593~1597) 5년 동안 조석으로 문안인사를 드렸던 곳으로 이 충무공의 효심이 깃든 충효의 장소로 알려져 오고 있다.

현재의 집은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창원정씨 문중에서 1930년 초에 개축한 건물(39평)이다. 이러한 충무공의 충효 사상들은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갑오(甲午:1594)년 1월11일(경인) 흐리되 비는 오지않았다.
아침에 어머님을 뵈옵기 위해 배를 타고 고음천에 대었다.
웅성대는 바람에 깨셨는데 기운이 가물가물하다.

1월12일(신묘) 맑음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인사를 고하니
진중(陣中)에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
하시며 두번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석별의 말을
하지 않으셨다.


이 집에 전해져 내려오던 유물로는 선소병기(船所兵器)의 인수인계서인 반열책(反悅冊)과 충무공 자당께서 사용하였다는 가재도구 중 절구통과 밥솥이 있었으나 반열책은 지금은 보존되지 않고 절구와 밥솥만이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이 충무공 자당께서 사용하였다는 돌절구
이 충무공 자당께서 사용하였다는 돌절구 ⓒ 김학수

이충무공 자당께서 사용하였다는 밥솥. 돌절구에 곡식을 빻아 이 솥으로 충무공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한다.
이충무공 자당께서 사용하였다는 밥솥. 돌절구에 곡식을 빻아 이 솥으로 충무공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한다. ⓒ 김학수
집터 양쪽에는 여수시와 여천군 당시 군수가 세웠다는
"이 충무공 모부인 초계변씨 유적비(李 忠武公 母夫人 草溪卞氏 遺蹟碑)" 2개 만이 족히 수백년 돼보이는 팽나무 숲에 세워져 있다.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정봉정(83) 할아버지가 동생 평호씨의 집을 기자와 동행하여 설명하고 있다(구 여천군수가 세운 유적비).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정봉정(83) 할아버지가 동생 평호씨의 집을 기자와 동행하여 설명하고 있다(구 여천군수가 세운 유적비). ⓒ 김학수

최근 여수시에서 세운 유적비
최근 여수시에서 세운 유적비 ⓒ 김학수
현재 창원정씨(昌原丁氏)후손인 정평호(71)씨가 살고 있는 이곳은 그 옛날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과 함께 많은 공적을 올리며 왜군을 추격하다 적탄에 전사해 병조판서에 추증된 용서(龍西) 정대수(丁大水) 장군의 생가(生家)이기도 하다.

돌아오는 길

자녀들에게 교육적으로 아무 것도 안겨준 게 없다며 되돌아가는 어느 가족의 푸념처럼 관광명소처럼 이정표만 세워놓고 관리하지 않는 여수시에 대해 느끼는 허탈함과 정대수 장군의 생가가 오랜 세월 동안 외면당하고 있다는 씁쓸한 아쉬움이 교차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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