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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만 잘해두 먹구사네 그려" 머쓱한 상 받기.
"욕만 잘해두 먹구사네 그려" 머쓱한 상 받기. ⓒ 곽교신
이밖에 기사로 옮기기 난처하게 질펀한 욕지거리를 퍼댄 대가로 두 어르신은 적지 않은 상금을 받았다. '욕을 썩 잘했다'고 상을 주는 곳은 아마 '춘천군 신동면 실레마을'밖에 없을 것이다.

조카딸로 맺어진 사돈지간인 이들은, 실레마을의 옛 글쟁이 청년 김유정의 흔적을 보고자 마을을 찾아온 외지 방문객들을 위해 "사둔(사돈)이고 체면이고 다 버렸다"며, 욕 잘한다고 신문에 쓸 거냐며 웃는다.

김유정 생가 마당에서 벌어진 '작품 속 캐릭터 찾기'의 올해 주제인 '욕필이 영감 찾기' 현장에서, 소설 <봄봄>의 작중인물이며 실레마을의 실존인물이었던 '욕필이 영감'(소설 속 '봉필'영감. 실명 '김종필')처럼 가장 질펀하게 욕을 해대는 '욕필이 영감 찾기' 대회를 보며, 실레마을을 찾은 탐방객들은 배꼽을 잡았다.

닭들의 죽기 아니면 살기.
닭들의 죽기 아니면 살기. ⓒ 곽교신
작품 <동백꽃>에서 '점순이'와 '나'를 연계시키는 중요한 소재인 닭싸움에서 연유한 "토종닭싸움 대회"도 귀한 볼거리였다. 농촌 토속언어로 작품을 구성하면서 토속적 습속도 작품 곳곳에 배치한 김유정 문학의 냄새를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자리이다.

시작하자마자 울타리를 뛰어넘어 줄행랑을 치는 닭도 있고, 이단옆차기 폼으로 날아올라 일격을 가하는 용맹한 닭도 있다.

닭싸움이 열린다는 안내방송에 말로만 듣던 닭싸움을 보려는 구경꾼이 겹겹이 몰려 진행자는 장내 정리에 애를 먹었다.

축제장에서 흔히 보는 떡메치기, 제기차기, 널뛰기, 줄넘기지만, 김유정 생가 흙마당에서 김유정 소설로 들어가 벌이는 놀이판은 감흥이 달랐다.

참가자 모두가 타임머신을 타고 1930년대로 올라가 소설 속 마을 사람들이 되어 흥에 취하고 소설에 취한 김유정 생가의 마당이었다.

1930년대로 간 문학기행 열차

기차를 타고 김유정역에 내려야 어딘지 격이 맞는 전국 유일의 열차문학기행인 이 행사에 참가한 이들은 제각각 김유정 열성팬을 자부한다. 연달아 실연을 겪은 김유정이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이 그의 연인을 자처하니 하늘의 김유정도 기쁘지 않을까.

문학기행의 멋, 열차 문학강의실.
문학기행의 멋, 열차 문학강의실. ⓒ 곽교신
부천에서 친구 셋이 왔다는 김정숙(54)씨 일행의 상기된 모습은 문학소녀의 들뜬 얼굴 그대로였다.

안양에서 엄마를 따라온 이세리, 윤문주(초등 5) 두 어린이는, 어디 가느냐는 질문에 처음엔 "놀러 간다"고 하더니 유인순(강원대) 교수의 열차 내 강의가 끝나고 다시 물으니 <동백꽃>의 한 장면을 멀쩡히 기억하며 기자를 가르치려 든다.

안산 송호고교 최연정 국어과 교사는 수업에 참고하려고 왔다면서, 중간고사 기간이 가까워 좋은 행사에 학생들과 같이 하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중국사회문화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소속으로 우리나라에 유학 와서 한국문학을 공부 중이라는 '초염'이란 여학생은 김유정 소설의 무대를 직접 본다는 설렘에 연인을 만나러 가듯 상기된 표정이다.

'초염' 외에 여러 학생들을 인솔하고 온 김영(인하대) 교수는 "문학기행이라는 외형적 의미를 따지지 않더라도, 감각적 오락이 판치는 세태에 문학의 이름으로 이런 행사가 열리는 것이 얼마나 좋냐"고 말하며 유사한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서어세요" 김유정의 마중인가, 마을의 마중인가.
"어서어세요" 김유정의 마중인가, 마을의 마중인가. ⓒ 곽교신
시대와 연령을 초월해 김유정 소설에 흡인된 사람들을 싣고 청량리역을 출발한 2005년 기차는 1930년대 기차로 바뀌어 '김유정역'에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지주의 아들이었고 당대의 인텔리였음에도 부자나 인텔리 언어로 쓴 소설이 아닌, 지주에게 뜯기고 마름에게 시달리던 피폐한 식민지 농촌의 언어로 당대 농촌을 생생하게 소설에 옮겨놓은 문학 언어의 혁명은, 사람 이름이 붙은 유일한 철도역인 '김유정역'을 만드는 역 이름 혁명으로 이어졌다.

역까지 마중나온 마을 농악대의 푸근한 환대를 받으며 문학촌까지 걷는 200여m 길 주위 풍경 모두는 그대로 소설 현장들이다.

어르신들은 가운데 상석, 문협 이사장, 문학촌장은 말석.
어르신들은 가운데 상석, 문협 이사장, 문학촌장은 말석. ⓒ 곽교신
열차시간에 늦어 택시로 기차를 뒤따라왔다는 한국문인협회 신세훈 이사장은, 문학촌 앞의 간단한 축하식장에서 입 간지러운 축하연설 대신 "강원도 촌놈 전상국이가 정말 보람있고 큰일을 한다고 해서…"하며 축사를 한 것도 김유정문학촌다웠다.

축하식장 맨 앞줄에 마을 어르신들과 나란히 문협 이사장이 앉고 문학촌장은 맨 끝자리에 조촐히 앉았다.

그들은 아무도 양복 윗주머니에 꽃을 달지 않았다. 흰 장갑을 끼고 나란히 서서 테이프를 끊으면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천편일률의 행사장면도 물론 없었다.

알싸한 동백꽃 향기

이 문학기행은 김유정 소설의 무대를 느껴보기 위한 현재화에 행사 비중이 맞춰져 있다. 전상국(강원대 국문과 교수) 문학촌장은 "늘 그렇지만, 이 행사는 문학촌이 주최한다기보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소설이 탄생되던 그 시대를 복원하는 기분으로 꾸민다"고 했다.

먼저 온 이들이 막걸리도 마시고 김유정 시대의 놀이에 저마다 분주한 사이 열차로 온 탐방팀은 유인순 교수의 안내로 김유정 소설 속으로 들어갔다.

소설 <동백꽃> 현장을 찾아 가는 문학기행팀. 봄볕은 나른히 풀잎에 조는데, 어디선가 "알싸한 동백꽃 향기"가 맡아지는 것 같아 자꾸 고개를 돌린다.
소설 <동백꽃> 현장을 찾아 가는 문학기행팀. 봄볕은 나른히 풀잎에 조는데, 어디선가 "알싸한 동백꽃 향기"가 맡아지는 것 같아 자꾸 고개를 돌린다. ⓒ 곽교신
골목길에선 갑자기 점순이가 튀어나와 딴지를 걸 듯하고, 모퉁이를 돌면 봉필 영감이 그의 데릴사위와 밭둔덕에서 밀고밀치며 씩씩거릴 것 같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후손이 살고 있고 김유정이 세우고 가르친 야학 '금병의숙'에서 배운 학생이 아직도 살고 있는 실레마을이니 아니 그럴까.

소설 속의 사건들을 현실이자 현재진행형처럼 차분히 설명한 유인순 교수의 해설과 김유정 문학의 흡인력에 이끌려 탐방팀 모두는 점점 소설 속의 1930년대 실레마을 사람이 되어갔다.

소설의 현장들을 돌아보고온 이들의 눈에 욕필이 영감은 단순한 이벤트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떡메로 찰떡을 쳐서 나눠먹으며 먹을거리 귀했던 식민지시대를 생각해보자고 한 것도, 먹을거리 장터로 깔끔히 포장한 주차장을 놔두고 논바닥에 차일을 치고 상을 편 것도 예사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걷는 대로 벼 그루터기가 걸리적대는 불편한 논바닥에서 대부분 참가자들은 "이것도 재미다"면서 국밥을 받아다 맛있게 먹었다. 직접 추수한 농산물로 지져냈다는 녹두전, 수수부꾸미도 입에 착착 붙는다.

이 모두가 김유정 문학의 향기요 문학의 힘이다.

뒤풀이마저도 김유정 향기 속에서

수고한 스태프들을 위해 펼쳐진 뒤풀이는 남은 음식으로 생가 마당 평상에 격식 없이 펼쳐진 막걸리판이었는데, 문학촌을 지키는 최종남 작가가 내온 남은 깍두기 한 양푼은 막걸리 안주의 최고 절정이었다.

자원봉사자였던 가수 이남이가 흥을 이기지 못하고 플라스틱 물뿌리개 통을 생수병으로 두드리자 묘한 리듬이 되었고, 이에 맞춰 그의 딸 '단비'(그룹 '철가방 프로젝트' 일원)가 평상 위에 올라가 "사랑 노래나 불러보자"를 우는 듯 웃는 듯 불렀다.

웃는가, 우는가. 사랑노래를 간절히 불러보고 싶었을 김유정의 마음을 노래하는 듯...
웃는가, 우는가. 사랑노래를 간절히 불러보고 싶었을 김유정의 마음을 노래하는 듯... ⓒ 곽교신
무대는 나무 평상, 조명은 푸르스름한 저녁하늘, 관객은 잔치로 지친 사람들.

잔치 끝의 풀어진 긴장과 김유정의 말년처럼 쓸쓸해진 생가 마당은 단비의 끓어질듯 이어지는 소리로 점점 메워져갔다.

유정의 소설에 푹 잠겼는지 단비는 내내 눈을 감고 노래를 했다. 노래를 들은 한 화가는 "이 광경에 난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진정으로 사랑노래를 부르고 싶었을 김유정이 틀림없이 그 자리 어디엔가 어울렸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 문학의 힘이다.

소설이 모두 현재인 실레마을에, 저녁 이슬이 김유정의 눈물처럼 촉촉하게 내렸다.

덧붙이는 글 | 먼지나는 행사장을 뛰어다니며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 "손님"들을 챙기던 노교수이며 작가인 전상국 문학촌장을 보며, 열악한 재정을 열정 하나로 메우며 이 시대의 문화를 지켜가는 많은 이들을 생각합니다. 

적은 예산으로도 행사가 알차게 진행된 바탕에 자원봉사자들의 진심어린 노고가 있었음을 따로 적습니다. 온갖 궂은 일이 모두 그 분들의 차지였임을 지켜보면서,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고 싶었음은 취재기자만의 느낌은 아니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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