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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처음 도착한 곳은 부론면 흥호리에 위치한 흥원창입니다. 고려시대부터 원주와 인근 지방의 조세를 모아두던 조창이 설치된 곳입니다. 지금은 흥원창을 알리는 돌비석과 간단한 안내문만 있지만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 흐르던 이곳은 세곡을 배에 실어 한양으로 운반하던 시절에는 교통의 중심지 노릇을 톡톡히 하던 곳입니다.

곡식 200여 석을 실을 수 있는 배가 21척이나 머물러 있던 곳이라 하니 흥원창에 보관되던 세곡이 엄청난 양이었다는 게 짐작이 됩니다. 그 많은 세곡을 짊어지고 배에 옮겨 싣던 이들의 거친 숨소리도 진한 땀 냄새도 지금은 느낄 수 없습니다. 섬강 물줄기를 만나 즐거운 남한강의 흐름에 눈길을 맡기고 생각에 잠길 뿐입니다.

ⓒ 이기원

흥원창과 같은 조창은 때로는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에겐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거두어들인 조세가 다름 아닌 백성들의 허기를 달랠 양식을 거두어간 것이기 때문이지요. 세곡을 풀어 굶주림을 달래주던 목민관도 없지는 않았지만 조창에 쌓인 엄청난 세곡은 백성들의 일용할 양식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 답사지는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였습니다. 현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절터입니다. 남한강 유역의 절터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규모가 큰 절터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이기원

발굴되기 전에도 이 절터를 찾은 적은 많습니다. 그때는 지광국사 현묘탑비와 당간지주가 있던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논과 밭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 모든 곳이 발굴터로 변해 있습니다. 아직 곡식이 자라고 있는 논과 밭도 있지만 그곳 역시 발굴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분의 말에 의하면 이 절터를 제대로 발굴하기 위해서는 10년도 넘게 걸린다고 하니 그 엄청난 규모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치권력은 종교적 권위를 빌어 자신의 지배 권력을 정당화했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왕조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요.

왕건이 주도하는 통일 과정에서 남한강 지역은 결코 우호적인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치악산을 근거로 했던 호족 양길이 궁예에게 패했고, 궁예마저 송악 호족이었던 왕건에게 밀려나고 말았으니 통일 고려 왕조에서 원주를 비롯한 남한강 일대의 사람들이 새 왕조에게 갖는 호감이 높지 않았던 것이지요.

고려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호의적이지 못한 남한강 일대의 민심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으로 불교의 힘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당대 법상종 최고 권위자였던 지광국사가 남한강 유역의 법천사에서 활동하다 입적한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지요.

ⓒ 이기원

ⓒ 이기원

산을 경계로 드넓게 펼쳐진 법천사 터의 엄청난 규모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법천사지에 남아 있는 지광국사 현묘탑비의 현란한 조각이나 거대한 당간지주에서는 당대 권력의 위압적 힘의 흔적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 이기원

ⓒ 이기원

진리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뜻으로 법천사란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고려 왕조의 절대적 영향을 받던 대찰이었으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보다는 권력이, 샘물이 아닌 강물이 되어 흐르던 곳이라는 느낌이 한 발 먼저 느껴지는 절터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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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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