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 이은화
콩을 들고 시장에 함께 나간 자매는, 그 콩을 다 팔 때까지는 더 이상 핏줄이 아니라 냉정한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참 어린 동생이 기를 쓰고 소리치며 콩을 파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엄마는 차마 같은 식으로 콩을 팔 수 없었다. 동생이 다 팔기를 기다렸다가 집에 돌아온 엄마는 공부를 포기하고 동생에게 양보한 뒤 그 길로 생업에 나서게 되었다.

욕심이 없는 그 선택이야말로 여태껏 엄마의 삶을 이끌어온 본 모습이었다. 그때 야무지게 콩을 팔았던 이모는 서울에서 사범대를 나와 평생을 선생님으로 일하며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콩 한 바가지로 운명이 갈려서 이모와 늘 비교되는 삶을 살아오던 엄마였다. 마음 속으로 다 감내하면서 받아들인 삶이었다.

엄마와 이모는 공교롭게도 띠 동갑에 생일도 같은 날인데 살아 온 모습은 그 날의 선택으로 인하여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덕을 쌓으며 착하게 살아라..."

참으로 외할머니는 편애가 심하셨다. 외손녀인 내 눈에도 보일 정도로 잘사는 이모네는 자나 깨나 걱정하고 위하면서, 어려운 우리 집은 당연하게 생각하셨다. 그렇지만 엄마는 한결같이 이모와 외할머니를 생각하셨다.

외할머니가 얼음길에 넘어지면서 잘 걷지 못하신 말년에는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외할머니는 워낙 성품이 까다로우신 분이라 아침에 올라온 반찬이 다시 올라오면 무척 싫어하셨다. 하루 세 끼 반찬이 다 달라야 하고 밥도 질거나 또는 되거나 하면 안 되었다. 그 까다로움을 다 받아주면서 엄마는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연천이 예전에는 이북이었다가 이남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민학교는 가을에 새 학기가 시작하기 때문에 7월에 졸업했답니다.
연천이 예전에는 이북이었다가 이남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민학교는 가을에 새 학기가 시작하기 때문에 7월에 졸업했답니다. ⓒ 이은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까다로운 성격이 이모 집에 가면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서는 반찬이 며칠을 가도 이모가 바빠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기시니, 편애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96세로 돌아가셨는데, 걷는 것만 불편했을 뿐 평소 소식을 하던 분이라 비교적 건강하시다가 돌아가시기 보름 전부터 앓으셨다. 그때 엄마는 조카며느리 집에 계시던 외할머니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시고 수발을 드셨다.

막상 외할머니가 눈을 감을 때는 가족들이 미처 도착하지 않아서, 사랑을 많이 주지 않은 딸과 맏사위만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한참 후에 친정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임종시에 엄마가 손을 꼭 잡고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외할머니의 극락왕생을 비는 노래를 울면서 부르는데, 그때 엄마의 모습과 노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더라고 전해 주셔서 가슴을 찡하게 했다.

마지막 임종을 지키는 자식이 진짜 자식이라고 하더니 엄마는 유난스럽게 편애하는 외할머니를 끝까지 지켜주었던 참 자식이었다. 이모가 외할머니의 운명을 보지 못하게 된 것조차 미안해 하고 안타까워할 정도였으니, 엄마의 마음 크기란….

자라면서 내가 봤던 엄마의 이런 모습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거지가 오면 새로 밥을 지어 상을 차려주어 요기를 하게 하여 보냈다. 그 모습은 엄마가 내게 보여준 가장 큰 교육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나한테 하시는 말씀 중에 "덕을 쌓으면서 착하게 살아라! 네가 덕을 쌓으면 그 복이 비록 너한테는 가지 않더라도 네 자식한테라도 갈 것이다"라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마치 엄마는 자신이 혜택 받은 삶이 아니었기에, 덕을 쌓으면 그 복이 자식들에게 가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살아오신 것 같기도 하다.

"엄마를 왜 닮았니?"

엄마는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두게 되었는데, 딸들이 많으면 엄마 닮은 딸이 있다고 하더니 살아오는 삶의 모습이 가장 많이 닮은 딸이 바로 나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였기에 비교적 평탄하게 살아왔지만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시면서 집은 어려워졌다. 결국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서울 행촌동에서 성남으로 쫓기듯 이사를 갔고 엄마는 새벽에 취로사업을 나가 힘든 노동을 하셨다.

어느 날 엄마가 나한테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가 셋째 딸이라 밑으로 여동생 하나 남동생 하나 위로 언니가 둘이었다. 그때 큰언니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작은언니는 고등학생 그리고 나는 중학생이었다.

"은화야! 내년에는 동생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는데 한꺼번에 둘이 입학을 하면 돈이 많이 든다. 너는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갔으니 한 해 쉬었다가 고등학교에 가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하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결국 한 해를 쉬게 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 것이 또한 나에게 공부 의욕을 꺾어버린 것이 되었다. 이미 공부를 잘하던 언니들이 대학을 포기한 것을 지켜보았고 언니들보다 못한 나였기에 대학을 가야 한다는 욕심을 버린 채 그냥저냥 학교를 다녔다.

후에 큰언니한테 그때 나를 공부 시켜주었다면 내가 다르게 살지 않았을까, 하고 원망 아닌 원망을 하자, "그것은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 네가 정말 공부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면 어떤 상황이든지 해내야 했다"고 말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내 탓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사는데 다른 딸들은 안정되게 잘 살지만 유독 나만 힘들게 살게 되었다. 사위가 잘 나가던 직장을 나와서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계속되는 실패로 빈곤하게 사는 셋째 딸을 바라보며 엄마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가만히 내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니 어느 세월에 엄마를 닮아 있었다.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그랬는데 나도 모르게 엄마의 모습대로 살고 있었다.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엄마를 닮았나봐! 엄마가 살아온 것처럼 내가 사는 것 같아." 철없이 한 내 말에 엄마는 "왜 나를 닮았니? 나를 닮지 말지…!"했다.

말하고 나서 죄송스럽고 미안해서 "엄마! 그래도 나는 좋아요. 나는 엄마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잘 아는 딸이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순간을 모면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엄마와 같은 모습의 삶을 살아 온 것이 오히려 기쁘다.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을까?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니….

몸으로 나타나는 인고의 세월들

한때 이런 옷차림과 포즈를 한 사진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한때 이런 옷차림과 포즈를 한 사진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 이은화
내가 살던 서울 행촌동은 인왕산 아래 산동네였다. 언덕과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야 나오는 동네였는데 어릴 적 동네에는 공동수도가 있었고 동네사람들은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 물지게를 지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엄마도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아 물지게를 지고 다녔다. 여자의 몸으로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 다녔으니 얼마나 허리가 아팠을 것이며 어깨는 또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인고의 세월을 견뎠으니 엄마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양쪽 다리 무릎에 물혹이 생기고 주사바늘로 물을 빼는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무릎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그 후에도 엄마는 허리디스크 수술도 하셨고, 수술했던 다리는 다시 연골이 다 닳아 지금도 잘 걷지 못한 채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주사를 맞으면서 견뎌내신다.

엄마의 손을 만져보면 그 손에는 많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곱디 고왔던 엄마의 손이 퉁퉁 부어 있을 때도 있고 드문드문 검버섯이 핀 손을 보며 엄마의 힘들었던 세월을 읽는다.

이제는 반백의 머리의 74세의 우리 엄마, 특별한 날 빼고 평생 화장 한번 하지 않고 오로지 남편과 자식을 위해 검소하게 살아오신 엄마, 비록 육신은 힘들었지만 우리 엄마의 얼굴에는 부처님 같은 인자함이 스며 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네

딸 넷과 아들을 키워내면서 단 하루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오지 못하신 엄마이다. 자식 하나 하나에 얽힌 이야기들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이런 일 저런 일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 하더니 다 출가시키고도 엄마 노릇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았다.

어느 겨울날 한 방에 자던 두 언니와 내가 새벽에 일어나다가 피식피식 쓰러졌다.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어 거품을 물고 쓰러지니 한 번에 세 딸을 잃을 뻔했다.

품안에 있던 딸자식들은 출가 시킬 때는 무척 서운해 하셨다. 큰언니 결혼식 끝나고 그날 밤에 아버지가 먼 하늘 바라보며 눈물을 지으셨고 작은언니 결혼하던 날 아침에는 엄마도 울고 작은언니도 울고 그렇게 품안에서 떨쳐내기가 힘드셨나 보다.

큰딸을 결혼시키고 산고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했던 엄마, 둘째딸은 살림살이 하나도 배우지 않은 가운데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보내면서 걱정, 임신 열 달 내내 입덧하는 것을 보며 걱정, 맏며느리인지라 첫아이가 아들이길 바라고 또 바라며 애태우시던 엄마….

결혼하자마자 중병에 걸린 셋째 딸, 매일 약병아리 한 마리씩 고아 먹이면서 뒷바라지 해주시느라 힘들었고 몇 년 후 셋째 딸과 막내딸이 한 병원에서 일주일 차이로 출산을 하는 바람에 이 방 저 방 뛰어다니시면서 친정엄마 노릇하느라고 녹초가 되셨다.

어느 날 고이 키운 하나뿐인 아들이 건설회사에 입사하여 첫 근무지로 전주 아파트 현장으로 갔다. 잠시만 내려와 달라는 전화를 받고 갔는데, 사고로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아들을 보면서 또 얼마나 가슴이 내려앉았으랴!

병원에 있는 동안 엄마와 아버지는 그 아들이 혹시나 반신불수가 되지 않을까 퇴원할 때까지 조마조마했다.

그 아들이 후에 베트남의 해외현장으로 나가서 또 한 차례 맘고생을 시켰다. 사무실에서 통역을 하던 아가씨와 눈이 맞아 국제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승낙할 수도 없고 반대할 수도 없고, 가족들의 의견도 반대의견이 워낙 많다보니 엄마로서 결정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아들의 결정을 존중해주고 엄마와 아버지가 베트남까지 가서 그곳 풍습대로 약혼시키고, 나중에 한국으로 데리고 들어와 다시 결혼을 시켰다. 그리고 며느리를 외국어대에 보내서 한국어 공부를 시키고 함께 살면서 살림도 가르쳐야 했다.

우리 딸들이 친정에 가면 모든 일을 엄마가 하는 것을 보면서 가끔은 불만을 이야기하면, 엄마는 "옥금(며느리 이름)이가 부모 떨어져 이곳 멀리까지 와서 사는 데 가엽잖니?"하면서 언제나 며느리를 감싸주곤 하셨다.

그런데 실은 5남매 중에 늘 느닷없이 일을 저지르는 딸이 있는데 그 딸이 바로 나다. 아마도 엄마의 애간장을 가장 많이 태운 딸이 내가 아닐까 싶다.

작은언니를 결혼시키고 숨도 돌리기 전에 내가 결혼하겠다고 부모님을 졸랐다. 조금만 더 있다가 결혼하라고 했는데도 당장 가겠다고 졸라서 기어코 결혼하더니 결혼 3개월만에 덜컥 병에 걸려 엄마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3년 후 첫아이를 낳을 때는 산모와 아이 둘 중에 하나는 힘들 것 같다는 긴박한 상황에서 수술실로 향하는 딸을 바라보며 또 얼마나 애가 탔을까…. 내가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다른 딸들은 얌전하고 차분한데 나는 왜 그리 어려서부터 말썽 많고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은지 오죽하면 돌연변이라고 했을까….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특이한 아이가 나였던 것 같다. 얌전한 듯하면서도 도발적이고 여린 듯하면서도 강하기도 하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우리 부모님들은, "너는 강한 아이다. 너는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 데나 내놓아도 너는 살 수 있는 아이다"하면서 힘과 용기를 주셨던 분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자식으로 인한 걱정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겠지만 또한 자식으로 인해 얻은 기쁨과 즐거움이 많다 하시니 아마도 그것이 부모의 삶인가보다.

50년이 된 결혼식 사진. 올해가 50주년입니다.
50년이 된 결혼식 사진. 올해가 50주년입니다. ⓒ 이은화

엄마, 엄마의 딸이어서 행복합니다

욕심없고 세상만사를 다 너그럽게 보시고 마음을 비운 듯 사시는 엄마를 보면 가끔은 '엄마가 부처님이구나' 생각한다. 어쩌다 나한테 좋은 일이 생길 때, "엄마가 덕을 많이 쌓으셔서 그 복이 나한테 왔나 봐요!"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너의 복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다른 엄마들처럼 악착같이 벌어서 나를 학교에 보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도 해본 적이 있었지만 엄마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교육시키신 것이다. 지식 대신 가슴에 따뜻한 사랑과 지혜를 심어 주신 것이다.

얼마 전 힘들어서 기운이 없어 하는 나에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공이 바닥을 치면 어디로 올라가겠니? 하늘로 치솟을 수밖에 없다. 네가 지금이 바닥이라고 생각하면 이제 곧 일어나게 될 것이니 용기 잃지 말고 파이팅 하렴."

공이 바닥을 치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듯 그렇게 쉽게 내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은 안하지만, 그 말씀이 항상 나에게 엄마의 따스한 마음으로 스며들어와 용기를 잃지 않고 살게 된다.

늘 착하시고 지혜가 있는 엄마의 딸이어서 행복하다. 엄마가 보여 주신대로 덕을 베풀면서 살아가리라.

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 응모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