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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조명자
있는 반찬, 없는 반찬 가짓수 대로 늘어 놓고 사람 불러 먹이다 보면 힘에 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손님이 간 뒤에 혼자 궁시렁 대기 일쑤입니다.

"내가 미쳤지. 하여튼 이 놈의 입이 방정이야."

그렇게 후회를 하고 며칠은 잠잠하다 또 그 버릇이 도져 친구들을 불러 댑니다. 별스런 반찬거리가 생기거나 하다 못해 멸치 다시다 국물에 말아내는 잔치국수를 해도 혼자 먹질 못합니다. 혼자 먹는 잔치국수가 별 맛 있겠습니까. 와글와글 수다 떨며 후루룩 먹어 대는 잔치국수라야 그것이 제 맛이지요. 오늘 또 생각지도 않은 손님을 초대하게 되어 오전 내내 지지고 볶고 한바탕 난리를 쳐댔습니다.

헌 방문 짝 떼어내고 새 것으로 달려고 사람을 불렀던 것이 그제 일입니다. 자잘한 일거리가 몇 푼 남겠습니까. 왕복 기름값 들여 촌구석까지 찾아오느니 차라리 일거리를 포기하겠다는 게 웬만한 업자들 마음입니다. 그래도 싫단 내색 없이 열심히 일을 하는 아저씨가 고마워 근처에서 제법 잘 한다고 소문 난 두부집으로 점심대접을 하러 나갔습니다.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 집 부인 얘기까지 진도가 나갔지 뭡니까.

"사모님은 여기 분이 아니신가 봐요. 서울 말씨를 쓰시는 것이…."
"아, 예…. 일산 살다 몇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지요."
"일산 사셨어요. 저도 요즘 우리 집사람 때문에 일산을 자주 다닙니다."

얘긴즉슨, 이 분의 부인이 4년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는데 지난해 가을에 폐와 뼈로 전이가 됐답니다. 첫 수술은 광주에서 받았는데 처가 식구들이 서울 큰 병원으로 가야 된다고 주장하여 일산 암센터로 병원을 옮겼다네요.

유방암 수술 부위도 나와 똑같은 왼쪽인데다 진행 정도도 나와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비슷한 경우에 나는 이렇게 살아났는데 그 부인은 어쩌다 재발이 됐을까?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부인이 지금 몇 살이에요?"
"마흔 둘입니다. 4년 전, 38살에 수술을 했지요. 사모님은 무슨 약을 드시고 나으셨나요?"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항암제 치료도 못했답니다. 간이 부실해 항암제 독성을 견뎌내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타목시펜이라는 대체 약으로 항암제를 대신했고 정기 검사만 충실히 받았지요. 참 부인한테 홍삼 엑기스는 꼭 먹이세요. 내가 먹은 것 중에 가장 효과가 좋은 약이었어요. 연구 결과에 의하면 면역력을 길러주고 항암성분도 아주 많다고 합디다."

아직은 젊은 나이 마흔 둘. 44살에 수술한 나보다 젊은 나이에 발병해 어쩌다가 재발이 됐을까? 고 1인 딸 아이와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딸 그리고 막둥이 아들이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랍니다.

"집사람이 성격이 좋아 잘 견디고 있어요. 그래도 많이 힘든지 잘 움직이질 못하네요. 요즘 불경기라 일거리가 별로 없어요. 아는 형님이 인천으로 일을 가자고 했는데 집사람 때문에 못간다고 했습니다."

내친 김에 손님 불러 모으는 그 버릇이 또 도졌습니다. 마침 재료가 맞지 않아 다시 한 번 오게 된 아저씨에게 올 때 부인까지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시골 공기도 쐴 겸 부인을 데리고 오세요. 아파트에서 누워있다 보면 더 기력이 없어지니까 기회 있는 대로 바깥 바람을 쐬야 해요. 내가 맛있는 시골 밥상 차려 줄 테니까 꼭 같이 와요. 알았죠?"

가뜩이나 입맛 없는 환자가 손수 만든 반찬이 무에 맛이 있겠습니까. 한끼라도 맛갈스런 반찬을 해먹이고 싶어 어제부터 반찬준비를 하였습니다. 무, 다시마 듬뿍 넣고 갈치조림을 만들고 쑥 된장국도 끓였습니다.

멸치액젓으로 맛을 낸 무우생채, 지난해 봄에 얼려 두었던 죽순도 꺼내 볶아놓고 상추 살짝 데쳐 나물로 해놨습니다. 야채를 많이 먹으려면 날 것보다 데쳐서 먹는 것이 좋은 것 같아 항상 나물을 하는 편입니다. 자운영 새 순이 너무 연해 한 바구니 뜯어다 고추장으로 나물을 했지요. 잔멸치 볶아 한 접시 놓고 마당 한 구석에 새파랗게 자란 부추 잘라 부추전을 만들었습니다. 알타리 김치, 파 김치, 배추김치까지 늘어 놓으니 고기는 없었지만 반찬 접시가 한 상 그득했습니다.

순하게 생긴 아이 엄마가 들어 섰습니다. 항암제 주사 맞은 지가 얼마 안됐는지 맨 머리 감추느라 모자를 썼더군요. 운동을 못해 살이 많이 쪘다며 웃는 얼굴이 부숭부숭 했습니다. 친정 동생 만난 듯 두 손 쓰다듬으며 다독거렸습니다.

씩씩하게 견뎌내 나처럼 살아나라고 등 두드려 주었습니다. 아저씨는 '어째 밥이 한정없이 들어간다'고 세 공기나 비웠고 아이 엄마 역시 밥 한공기를 깨끗하게 비웠습니다. 내가 만들어준 반찬 맛있게 먹는 아이엄마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더군요.

남은 상추 싸보내며 심심하면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신신당부 했습니다. 언니처럼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찾아오면 메뉴 바꿔가며 맛난 반찬 해주겠다고 꼬시기도 했습니다.

기도 제목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 엄마, 나처럼 잘 견뎌내 삼남매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보낼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 달라고. 그 부부가 타고 온 2.5톤 트럭 뒤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그렇게 대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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