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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2월 7일 고 제정구 의원 추모식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자를 향해 "노무현보다는 제정구가 옳았어. 무슨 변명을 그렇게 해"라고 소리친뒤 앉아 있던 박계동 의원.
지난 2003년 2월 7일 고 제정구 의원 추모식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자를 향해 "노무현보다는 제정구가 옳았어. 무슨 변명을 그렇게 해"라고 소리친뒤 앉아 있던 박계동 의원.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 박계동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사감이 있다고 보나.
"(잠시 뒤) 있다. 기자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정통을 자임하는 민주화 운동 세력이 느닷없이 나타난 노무현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 아닐까.
"그것만은 아니다."

90년 '꼬마민주당' 시절부터 노무현과 박계동을 지근거리에서 보아온 한 인사와 나눈 대화다. 그는 고 제정구 의원과 오랜 동안 빈민운동을 해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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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동 "공을 노무현 머리로 생각하고 힘껏 치세요"

1992년 14대 국회에서 배지를 단 후 12년만에 다시 국회에 재입성한 박계동 한나라당 의원은 17대 국회에서 줄곧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감정의 날을 세워왔다.

작년 6월 17대 국회 개원식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축하연설 도중 주변에 들릴 정도로 조소를 보냈고, 대통령의 입·퇴장시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등 대통령에 대한 의례를 갖추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된 행동에 대해 박 의원은 "몰상식한 대통령에게 무슨 예의냐"며 당당한 태도였다.

지난 3월 노 대통령의 취임 2주년 기념 국회연설 때에는 아예 본회의장에 입장하지 않는 방법을 취했다. 박 의원은 대통령이 연설을 마친 뒤 본회의장을 빠져나가자 바로 회의장에 들어서며 "노무현 퇴장, 박계동 입장"이라는 말을 던지며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최근엔 또 자신의 지역구(서울 송파)에서 열린 테니스대회에 참석, 축사에서 "공을 대통령의 머리라고 생각하고 힘껏 쳐 날리시라"고 말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정책적, 정치적 입장의 반대가 아닌 '정서적 반감이 큰 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행동이다.

박 의원 자신은 "사감은 없다"고 말한다. 박 의원은 기자에게 "정책적 반대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야 합의로 처리된 행정도시특별법을 '수도분할법'이라 규정, 장외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박 의원은 "대통령이 한다고 총리가 밀고, 여당이 따라가고, 야당이 들러리서는 꼴"이라며 "히틀러 시대의 집단질병(페라노이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반DJ, 반노로 투사?

하로동선 시절의 박계동, 김원웅 의원과 노무현 대통령.
하로동선 시절의 박계동, 김원웅 의원과 노무현 대통령.
사실 노 대통령과 박 의원은 동지적 관계였다. 87년 민주화 항쟁의 성과로 얻어진 대통령 직선제에서 후보단일화에 실패, 정권을 내준 후 노 대통령과 박 의원은 '3김 청산' '지역주의 척결'을 내세우며 DJ, YS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또 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DJ가 95년 정계복귀를 위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민주당 의원들을 대거 빼갔을 때도 당적을 바꾸지 않았다. 1996년 총선을 앞둔 시점이었지만 이들은 '재선'에 연연해하지 않고 시민사회 세력의 개혁신당과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김원기 대표·제정구 사무총장)를 결성하며 3김 청산의 깃발을 곧추세웠다.

결국 이들은 3김의 벽을 넘지 못하고 96년 총선에서 대거 낙선하고,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간판으로 식당을 열어 재기를 엿보았다. 당시 총선에서 유일하게 국회 입성에 성공한 이부영과 제정구 전 의원이 대출을 받아 하로동선의 자금을 대기도 했다.

당시 총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박 의원은 '노무현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박 의원은 96년 4.11 총선에서 시국강연회를 여는 등 사전선거운동을 벌인 혐의로 벌금 6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 때문에 2000년 8·15 특별사면으로 복권되기 전까지 피선거권이 박탈돼 16대 총선에도 출마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박 의원은 선거법 위반 발언을 한 사람은 당시 종로구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이라며 "DJ는 분열주의자, JP는 부패, YS는 무능하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세위원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자신이 처벌받았다며 법정에서 항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들의 관계는 97년 대선을 앞두고 금이 갔다. 노 대통령은 97년 대선 직전 DJ(새천년민주당)에게 갔고, 박 의원은 제정구, 이부영 등 통추 잔류 세력과 당 대 당 통합의 형식으로 YS의 신한국당을 선택, 한나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97년 대선에서 이들은 '정권교체'와 '3김 청산'의 구호로 각각 김대중과 이회창 진영에서 맞섰다.

이후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또 한나라당의 '독수리 5형제'가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통추 멤버들은 다시 조우한다. 노무현은 대통령으로, 김원기는 국회의장으로, 유인태·김원웅·김부겸 등은 재선에 성공했고, 이부영, 이철, 김홍신 등은 열린우리당 당적으로 재기를 노리고 있다. 제정구 의원이야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박계동 의원만 남은 셈이다.

지난 2003년 2월 7일 고 제정구 의원 추모식에서 묵념을 드리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원기, 이부영, 김홍신 의원.
지난 2003년 2월 7일 고 제정구 의원 추모식에서 묵념을 드리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원기, 이부영, 김홍신 의원.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무덤 속 제정구'는 뭐라 할까?

박계동 의원의 노 대통령에 대한 앙금은 2003년 제정구 의원의 5주기 추도식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노 대통령은 당시 당선자 신분으로 검은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나타나 이례적으로 긴 추도사를 남겼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통추 앙금을 털어내고 싶어했다. 특히 대선 운동 과정에서 내뱉은 자신의 '실언'을 사죄했다.

"지난 대선 때 통추 인사 가운데 한나라당을 택했던 사람들을 두고 '권세와 이익을 쫓아갔다'고 말한 것에 대해 해명하고 싶다...당시 방송연설 원고에 (제)정구 형 등 사람을 특정하지 않고 두루뭉수리하게 돼 있어서 그냥 읽었던 것인데 나중에 젊은 동지로부터 직접 항의를 받고 보니 유족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사과와 양해를 구한다. 내가 추모식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다."

노 대통령은 이날 고인이 강조한 '상생'을 상기하며 협력과 공존을 역설했지만 박계동 의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식장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박 의원은 "노무현 보다 제정구가 옳았어. 무슨 변명을 그렇게 해"라고 노 대통령의 면전에 대고 고함을 쳤다. 노 대통령은 이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앉아 있던 유인태 의원은 "누가 누구에게 그런 얘길 하냐"고 쏘아부쳤다.

기사 서두에서 박 의원의 '사감'을 지적한 인사는 박계동 의원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연 무덤 속 제정구가 뭐라고 할까. 내 원한을 풀어주어 고맙다고 할까. 내가 아는 제정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제 털어야 한다. 3김 정치가 마감되고 민주화운동 세력이 정권을 잡지 않았나. '과거회고적' 행위는 미래를 위해 도움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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