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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 주산지를 찾아가는 길, 온갖 꽃들이 한창입니다. 길 가의 개나리가 손짓을 하는 사이, 벚꽃이 화사한 얼굴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목련은 이미 터질 대로 다 터져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 농염하기까지 합니다.
필 때는 더 없이 화려하고 고운 목련도 질 때는 아픈 상처처럼 짓물러 터지는 법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그러함을, 질 때 아프지 않은 일들이 없음을 봄꽃을 보며 새삼 깨닫습니다.
잎 돋는 눈부신 연초록을 기대하고 간 주산지, 그러나 주산지에는 아직 겨울이 다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먼발치에서나마 떠나기를 아쉬워하는 겨울은 주산지의 왕버들잎을 조금 더 늦게 피우게 합니다.
그래도 산수유 노란 꽃망울이 이제 봄이라고 알려줍니다. 호수를 질러 살랑대는 바람과 물살들도 봄이라고 소곤대고 있습니다. 그 속삭임에 겨울이 작별의 인사를 하고 발길을 돌리는 주산지는 눈부십니다.
지난 겨울에 찾았던 주산지의 겨울은 깊디 깊었습니다. 꽁꽁 언 호수 위에 쌓인 눈을 매운 겨울바람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끙! 끙! 얼음이 우는 소리가 마음을 저리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얼음은 마치 어찌 할 수 없는 그리움에 속병을 앓는 청춘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귓불 떨어질 듯 세찬 바람 속에서 나는 그저 넋 놓고 멍하니 얼음 우는 소리만 듣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 울음소리는 호수의 비명일지도 모른다고, 아니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우리의 마음 속 비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산지,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배경이기도 했던 때문일까요? 나는 겨울 호수를 바라보며, 조금씩 다르면서 또 끝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생(生)의 덧없음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 시린 얼음 속에 제 뿌리를 내리고 그저 묵묵히 서 있는 왕버들의 안타까운 겨우살이도 이제 다 지난 듯합니다.
다시 찾은 주산지에는 봄 물결 일렁이고, 이른 잎들이 새 순을 틔워 올리고, 그렇게 또 한 계절을 열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다른 무엇보다 봄꽃에 마음을 빼앗긴 적도 있었습니다. 봄꽃들이 세상천지 다 죽은 듯 적막한 겨울은 지나고 이제 봄이 왔다고 잎사귀도 없이 먼저 꽃망울을 터트려 풍성한 잔치를 열 때면 제 마음속은 온통 그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일시에 져 버리고 마는 봄꽃들의 덧없음을 깨달은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습니다. 올해 꽃 진자리에 내년이면 또 꽃이 피어나겠지만, 그것을 바라볼 사람은 같지 않다는 생의 유한성 때문일까요? 혹은 너무나 화려했던 꽃의 기억 때문일까요?
순식간에 피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져버리는 찰나의 눈부심이 봄꽃을 더 허전하게 만드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꽃 진자리에 피어나는 연초록 잎사귀들에 더 애착이 가게 됐습니다.
봄이 온 주산지를 바라보며, 저는 아직 잎 돋지 않은 물 속 왕버들 가지 끝에 피어나는 연초록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쪼롱쪼롱 우는 새 몇 마리가 왕버들 가지 끝에 앉아 지저귀고 있습니다. 호수를 넘쳐흐르는 물은 골짜기 아래로 달려 나갑니다. 저 물은 흐르고 흘러 봄 들판을 적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천지 아득하게 봄날을 불러 올 것입니다.
저는 한동안 앉아 있던 호숫가에서 한껏 기지개를 켜고 일어섭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왕버들은 물 속에서 호수의 봄기운을 양껏 뿜어 올려 금방 잎을 틔울 듯 팽팽합니다. 호수도 왕버들도 기지개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 겨울이 가고, 봄은 그렇게 기지개를 하며, 호수의 일렁이는 물살을 타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생의 새로운 나날들도 그렇게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