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박연폭도. 종이에 수묵. 50 X 120Cm
박연폭도. 종이에 수묵. 50 X 120Cm
2005년 4월 6일부터 보름동안 경복궁 동쪽에 박연폭포의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진다. 중국식 산수화 일색이던 18세기 조선 화단에 던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반동'이요 '회화의 폭탄'이었다.

겸재의 걸작 <박연폭도(朴淵瀑圖)>가 특유의 명쾌한 시각으로 그림을 읽어내는 이태호(명지대) 교수의 기획으로 경복궁 동쪽 학고재에 걸린 것. 이 그림의 외출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기획전 이후 10여년만의 일이다.

기획자가 의도한 전시회 이름은 '조선후기 그림의 기(氣)와 세(勢)'다. 임진왜란의 환란을 완전히 걷어내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크게 부흥했던 18세기는 가난한 양반의 후손이었던 겸재의 끼와 불만이 폭발하기엔 더없이 좋은 시대적 환경이었다.

박연폭포의 절경에 취한 겸재가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에라, 모르겠다'며 마음가는대로 붓을 휘저어 그린 듯한 <박연폭도>에는 그야말로 '세(勢)'가 흐르고 넘친다.

개성 박연폭포의 실제 높이는 20여 미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연폭도>에 그려진 사람의 키와 견주어 역산해보면 폭포 높이는 38미터 내외에 이른다. '조선의 풍광을 조선식의 필치로 사실대로 그린다고 주창한 겸재이기에 2배의 과장은 허풍에 가깝다. 그러나 그 허풍은 화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허풍이다.

폭포의 실제 폭과 높이보다 과장하여 주욱 늘어뜨린 그림 속 폭포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화폭 밖으로 물은 한 방울도 튀어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웬만한 사람의 귀에도 그 힘찬 물소리는 굉음으로 들리니 이상한 일이다.

왼쪽 소나무 위로 우뚝선 남근, 정자 밑의 여근이 뚜렷하다.
왼쪽 소나무 위로 우뚝선 남근, 정자 밑의 여근이 뚜렷하다.
과장으로 휘저으면서도 절제했으며, 절제했으면서도 폭포의 세(勢)와 감흥의 세(勢)까지는 절제하지 못한 겸재의 솔직함이 허풍으로 그려진 가히 당대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 그 솔직함이 범부의 눈에 허풍으로 보였을 뿐이다.

이쯤 되면 이는 과장이요 허풍이 아니라 감흥의 솔직한 고백이다. 여기에 남녀의 성기를 폭포 밑 좌우에 보일 듯 말듯 숨은그림찾기처럼 그려 넣은 농밀한 음양의 배치는 또 하나의 자신감 넘치는 세(勢)의 표현이다.

<박연폭포> 옆에 걸린 겸재의 <어촌도>와 <관폭도>에서는 아예 한술 더 떠서 음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음에도 전혀 도색적이지 않은 것 또한 감흥의 솔직한 고백 때문이리라.

장백산도의 '무서운 고요'

장백산도. 종이에 수묵. 122 X 26Cm.
장백산도. 종이에 수묵. 122 X 26Cm.
기획자가 '기(氣)의 그림'으로 표현한 능호관 이인상의 <장백산도>는 웅혼한 기상으로 '기가 질리게'한다. 백산(백두산)을 실경으로 그린 유일한 조선의 그림이기도한 장백산도의 넓은 여백은 폭발 직전의 긴장으로 오히려 조용하다. '무서운 고요'는 이 그림의 숨은 백미다.

장백산도 부분도
장백산도 부분도
박연폭도가 감흥 절제에 실패했음을 솔직하게 그렸다면, 장백산도에는 무서울 정도로 제압당한 절제가 화폭 전면에 흐른다.

무서운 고요에 눌리며 화폭 중간의 산봉우리를 밑에서부터 서서히 따라 오르던 필자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붓 자국을 따라가면서 느끼는 엘리베이터 효과는 극도로 절제된 감정이 서서히 감상자에게 전달되게 만든 놀라운 수법이다.

이 두 편의 그림만으로도 감격을 주체 못할 판에, <취화선>의 스타 오원 장승업이 더해졌으니 작은 개인 화랑에서 이 무슨 눈의 호사인가. 8폭 병풍을 그림만 떼어 표구한 오원의 그림은 산수 인물 화조가 뒤섞였으니, 한 병풍에 이처럼 주제가 뒤섞인 것도 흔한 예가 아니다. '스타'는 어디 가나 티를 내는가보다 하며 웃음이 나온 것은 필자의 치졸함인가.

치졸하여도 좋고 감격에 탄성을 질러도 좋다. 화가가 솔직히 그렸듯이 그림 앞에서 자기 느낌에 솔직하면 그것이 최고의 감상자다. 겸재가 그림의 폭포에 '뻥'을 놓아 이토록 필부를 감격시키는데, 그림 앞에서 필부가 치졸한들 누가 뭐라 할까.

그림의 기(氣)와 세(勢)를 받아 가길

필자가 주목한 그림으로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공재 윤두서의 채색화 <요지연도(瑤池淵圖)>와 <요지군선도(瑤池郡仙圖)>가 있다. 극사실 세필의 자화상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그림"이라며 서구인들을 놀라게 했던 공재의 채색화는 그림 보는 흥미를 더한다.

기획자 이태호 교수
기획자 이태호 교수 ⓒ 곽교신
그 외에도 겸재의 <북단춘의도>, <어촌도> 이인문의 <도봉산 사계도> 등이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처음 공개되었는데, 그림이 뿜어내는 서기(瑞氣)가 학고재 화랑 밖으로 나와 경복궁 봄을 가른다. 감격에 겨운 이번 기획 전시를 보며 못내 아쉬운 것은, 매일 가서 보고 또 봐도 모자랄 눈의 호사를 4월 20일에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태호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 전시된 그림들을 보고 가서, 임진란 후의 침체를 딛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문예부흥기를 이뤘던 18세기의 기(氣)와 세(勢)를 받아, 작금의 침체한 사회분위기를 일소하는 데 보탬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런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걸려 언제든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규모 화랑에 <박연폭도>와 <장백산도> 및 귀한 그림을 전시한 기획자의 역량과 학고재의 안목에 찬사를 보낸다.

덧붙이는 글 | 전시장은 인사동 학고재가 아닌 '소격동 학고재'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무료입니다. 
문의   (02)720-152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