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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여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4·3에는 제주도민들을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폭도’로 내몬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만의 학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거의 모든 억울한 죽음이 차마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지막지한 군의 ‘초토화 작전’의 산물이었으나, 이 중 일부 도민들 사이에 저질러진 참혹한 죽음은 제주도민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낮에는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들이 마을마다 찾아와 폭도들과 내통했다고 살육을 일삼고, 밤에는 무장대(군과 경찰의 표현을 빌자면 폭도)들이 마을로 내려와 군과 경찰에 협조했다며 민간인들을 죽였던 게 57년 전 제주의 현실이었다.

▲ 군의 선무귀순 작전에 따라 하산한 주민들.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 많이 보인다. 제2연대 제주도 주둔기 앨범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했던 이웃주민을 죽이거나 밀고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단순히 살기 위해서였다. 누군가를 폭도로 몰지 않고서는 자신이 폭도로 몰려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부모 형제들을 졸지에 잃은 유족들에게 부모, 형제의 학살은 57년이 지난 지금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기억일 수밖에 없다. 특히 자신의 부모와 형제를 죽인 학살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유족들에게 지난 세월은 참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이었다.

더구나 부모와 형제를 죽인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은 자식된 입장에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무장대 철창에 13군데나 찔려 희생된 양상석씨 아버지

양상석(80·북제주군 남원읍 남원1리)씨와 김두연(61·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씨.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제주가 화해와 상생을 이야기하고, 평화의 섬으로 지정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됐다. 이들은 4·3과의 모진 악연을 끊은 진정한 ‘화해자’였다.

▲ 4·3 당시 무장대에게 아버지를 잃은 양상석씨. 그러나 그는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았다.
ⓒ 제주의 소리
4·3 당시 23살이었던 양씨는 무장대에게 부친(양갑손·60)과 숙부(양근손·50대)를 잃었다.

1948년 11월 28일. 무장대는 남원면사무소와 경찰지서 소재지인 남원리 1구(남원1리)를 대대적으로 습격했다. 폭도들과 내통했다며 경찰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마구 학살하는 데 격분한 무장대들이 경찰지서를 1차로 습격했다. 당시 양씨의 부친과 숙부가 무장대의 철창에 찔려 죽었다. 이날 하루 마을주민 30여 명이 학살됐다.

“사태가 진정된 후 집으로 돌아가는 데 아버지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가슴과 다리, 팔 등 온 몸에 철창을 맞았습니다. 13군데 찔렸습니다. 길바닥이 피바다였습니다. 아무런 정신이 없었습니다. 울음도 나지 않았죠. 어머니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 생각부터 났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 돌아가셨수다’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당신도 가슴이 찢어지셨겠지만 ‘너희들이라도 살아 있으니 됐다.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라’며 오히려 저를 안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양씨의 머리에는 복수 밖에 없었다. 양씨의 이야기다.

“총으로 한 방에 쏴 죽인 것도 아니고 철창으로 13군데나 찔러 죽였으니 그것을 본 저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아버님이 숨을 거둘 때까지 당했을 고통을 생각하니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내 손으로 반드시 찾아 죽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양씨는 부친을 죽인 무장대가 누구인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양씨가 복수를 포기한 데에는 어머니(1999년 작고)의 간절한 당부 때문이었다.

“아버지 장사를 지낸 후, 어머니께서는 내가 집을 나설 때마다 올레(마당)까지 나오시면서 ‘절대로 복수하지 마라. 복수한다고 죽은 부모 안돌아 온다. 남을 때리지도 말고 궂은소리도 하지 마라’고 매일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참고 지내려니 몇 년 동안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 1952년 군 지프를 타고 제주도를 순시 중인 이승만 대통령. 뒷줄은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과 제1훈련소장 장도영 준장. 국가기록원 소장.

"4·3 학살은 이승만 책임...가해자도 결국은 희생자일 뿐“

▲ 양상석씨는 이제 자신의 대에서 4·3의 악연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 제주의 소리
그러나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잊었다. 아니 아버지의 원수였던 무장대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서 4·3의 모든 책임이 이승만 대통령에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있었다면 중산간에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해 제주도민을 다 죽여도 좋다고 하면서 중산간에 있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였으니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지서를 공격한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부모 잘 만나서 해변가에 살았고, 그들은 중산간에 살았다는 게 죄였다면 죄였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피해를 더 받고 있습니다. 중산간 마을에 살면서 조상들이 잘했든 잘못했든 산에 가담했다고 해서 자식과 손자들은 연좌제에 묶여 취직도 안 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아버지가 그들 조상의 손에 죽기는 했지만 그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후손이었습니다. 누가 가해자고 누구를 피해자라고 할 수가 없는 시대였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꿩 새끼 보다 못했던 게 당시였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와 숙부를 죽인 학살자를 용서한 양씨. 그러나 지난 57년의 아픈 세월은 결코 그에게 박수만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남원1리가 무장대에게 습격을 받자 군경은 양씨는 물론 양씨처럼 무장대에게 가족을 잃은 주민들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무장대 가족이거나 그들과 내통한 사람, 또 가족 중에 산에 올라간 사람들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양씨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떨어진다면 그 가족은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씨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들(무장대)도 희생자’라는 양씨의 생각은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주민들은 물론 유족회 인사들로부터도 “왜 그들을 감싸고 도느냐”는 질책을 받아야 했다.

“다 부질없다는 생각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다고 어찌하겠습니까. 우리 자식들에게 ‘누가 할아버지를 죽였으니 반드시 기억하라’고 말하겠습니까? 후손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이제 ‘구원(舊怨)’을 풀어야 합니다. 내 시대에서 4·3의 악연은 끊을 것입니다.”

형은 군인에게, 아버지는 무장대에게 살해당한 김두연씨

양상석씨가 무장대에게 부친과 숙부를 잃었다면 4·3 당시 4살이었던 김두연(61·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씨는 군과 무장대에게 형(김두옥·21)과 아버지(김창수·40)를 잃은 기구한 운명 속에 지난 57년을 살아왔다.

김씨가 살았던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는 제주지역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주민들이 죽음을 당한 마을로 268명이 죽었다. 김씨의 형은 군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이후인 1949년 1월 9일 동네 청년 7명과 함께 군인들에게 끌려가 함덕초등학교에서 총살을 당한다.

4·3 당시 죄명 아닌 가장 큰 죄명은 바로 ‘젊다는 것’이었다. 군·경은 마을 청년들이 산으로 올라갈 위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주도의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에 2000년 2월까지 신고된 피해접수자 1만2243명의 중 20대가 34.7%, 10대 17.3%, 30대가 15.1%였다. 10대~30대가 전체 희생자의 67.1%를 차지했다. 4·3 당시 ‘젊음’은 빨갱이 이상의 죄명이었다. 김씨의 형 두옥씨도 젊었기 때문에 처형당했다. 함덕리에는 2연대(연대장 함병선) 2대대가 주둔했다.

▲ 4·3 당시 아버지와 큰 형이 무장대와 군인에게 처형 당한 김두연씨.
ⓒ 제주의 소리
“아버지는 3대 독자였습니다. 그러니 장남인 큰 형님은 소중한 존재였죠. 그러나 혈기 왕성한 청년은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낮에는 군,경의 눈을 피해 밖에 숨어 있다가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군은 마을 청년들에게 ‘자수하면 살려준다’며 자수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자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마을의 유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수하면 살려줄 줄 알고 형님을 자수시킨 거죠.”

이 때 함덕리에서는 7명의 청년이 자수를 한다. 그러나 ‘자수하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던 군은 7명의 청년을 함덕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끌고 가 총살시켜 버린다. 김씨의 형은 포박당한 상태에서 운동장에서 도망치다 뒤쫓아 온 군인들에 의해 함덕해수욕장 입구에서 죽임을 당한다.

“저는 당시 4살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죠. 그러나 나중에 커서 들으니 큰 형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군인들에게 총살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젊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에게 총살을 당했다고 해서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총살당한 가족은 오히려 ‘빨갱이’ ‘폭도’의 낙인이 찍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경의 말을 순순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군·경은 그런 마을주민들을 적극 이용했다. 중산간 지리를 잘 알지 못했던 군인들은 주민들을 토벌에 앞장세웠다. 총알받이인 셈이기도 했다. 이때가 1949년 4월 4일이다.

김두연씨의 이야기다.

“군에서 토벌에 나오라고 하면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부하면 곧 죽음이었습니다. 형님이 죽고 난 지 3개월도 안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형님을 총살시킨 군의 토벌에 참가한 거죠. 함덕리의 주민 대부분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토벌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갖고 갔던 우비를 놔두고 온 게 생각나 혼자 선흘2리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우비는 당시에 귀한 물건이기 때문에 찾으러 갔었던 것 같습니다.”

토벌대와 떨어져 우비를 찾으러 간 아버지는 불행히도 무장대에 잡히고 만다. 김씨는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34년이 흐른 1982년이 돼서야 아버지를 붙잡아 죽인 무장대원에게 직접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 34년 지난 후 알아...학살자 집으로 찾아가 용서

무장대원들은 아버지를 ‘군·경의 앞잡이’라며 포박한 후 선흘2리 ‘거믄오름’ 앞에 있는 38m의 수직 동굴 밑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마을 청년들의 도움으로 1982년 아버지의 시신이 있는 동굴을 찾았던 그 날, 김씨는 아버지를 붙잡아 동굴로 떨어뜨린 같은 마을에 사는 무장대원으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듣는다. 정말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형님은 군인들의 손에 죽고, 또 아버지는 3개월 후 무장대 손에 죽은 것이다.

▲ 아버지의 죽음을 말할 때 괴로워하는 김씨.
ⓒ 제주의 소리
“오래 전부터 그 분이 아버님의 죽음 현장에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 아무도 그 분에게 ‘왜 아버지를 죽였느냐. 무릎 끓고 사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신을 찾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분이 동네를 떠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님의 장사를 지낸 3일 후에 술을 사 들고 그 분의 집엘 찾아갔죠. 저가 먼저 무릎을 꿇고 ‘당시에는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 삼촌(제주에는 이웃집 아저씨를 삼촌으로 부른다)이 잘못한 게 아니라 그 시대가 잘못됐다’고 말하면서 함께 마을에서 살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를 동굴에 떨어뜨린 그 무장대원은 4년 전에 죽었고, 김씨는 그 집에 다시 찾아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승에서 지닌 아픔 저승에서는 풀어 편안히 쉬라고…. 형을 죽인 군인도, 아버지를 죽인 무장대도 그는 이미 용서했다.

김씨는 현재 4·3유족들의 모임인 ‘제주도 4·3사건 희생자 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4·3을 ‘시대의 아픔’이라고 말한다. 김씨는 4·3 당시 억울한 죽음의 진실이 밝혀졌고,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해 도민과 4·3유족들에게 사죄한 만큼 이제는 가해자와 피해자 구분 없이 서로 화해할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4·3 57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에서 화해와 상생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아직도 우익단체에서는 4·3을 공산폭동이라고 주장하고 일부 보수인사들은 2003년 정부가 확정지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놓고 위헌제청을 하고 있다. 또 희생자 결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일고 있다.

이해찬 총리 “문형순 서장 이야기 감동적”...화해와 상생 강조

김씨는 이에 대해 단호하다.

“그들(우익보수단체)은 4·3 당시 도민들을 죽였든 안 죽였든 간에 지난 반세기 동안 제주에서 기득권을 쥐고 호위호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폭도다, 빨갱이다, 남로당 간부다’며 빨간 딱지를 붙이려 합니다. 그 당시 도민의 84%가 토벌대(군경 등)에 의해 죽었는데 그렇다면 2살 난 어린이도 빨갱이고, 70세난 노인이 폭도란 말입니까. 그들은 억울한 희생자일 뿐입니다.”

다소 흥분한 김씨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들은 우리가 살인자로 고발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반세기가 흘러 이제야 겨우 억울한 오명을 벗으려는 데 ‘그동안 고생했다’며 위로는 해 주지 못할망정, ‘희생자 인정은 안 된다. 보고서는 왜곡됐다’고 주장한다면 이제는 더 이상 우리도 참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밉지만 용서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후손들에게 우리의 아픔을 물려주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57주년 범도민위령제에서 이해찬 총리(중앙)와 함께 헌화하고 있는 김두연 4·3 유족회장(맨 우측).
ⓒ 제주의 소리
김씨는 지난 3일 4·3 57주년 범도민위령제에 참석했던 이해찬 국무총리의 말도 전했다.

“오찬장에서 이 총리는 바로 저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총리는 저에게 화해와 상생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모슬포와 성산포 서장을 지낸 문형순 서장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며칠 전 <오마이뉴스>에서 문형순 서장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봤다. 그 어려운 시기에 그 같은 분이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이야기다. 화해와 상생으로 나가는데 모범적인 이야기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국무총리마저도 이제 화해와 상생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3만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4·3사건이 일어난 지 57년이 흘렀다. 그러나 그 당시 가해자 편에 섰던 그 누구도 자신의 잘못에 용서를 빌거나 암울한 역사에 대해 참회하는 이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광주시민들을 죽였던 공수특전대원들이 5·18민주화 묘역을 찾아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는 제주에서는 생소하다. 용서가 있다면 그것은 희생자가 가해자에 대한 용서일 뿐이다. 3만여 명이 학살당한 제주4·3의 화해는 희생자들에게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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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재홍 기자는 제주의 소리(www.jejusori.net)의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제주의 소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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