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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시간은 건강한 남자의 순수 도보 시간으로 휴식 시간은 포함되지 않았음, 노약자나 단체 인솔시 충분한 시간 안배를 요함.' 여수해양경찰서 김배선 경사가 만들어 놓은 산행도엔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 6개월여만에 다시찾은 가부좌나무, 말끔히 정리되어 있고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여수해양경찰서 김배선 경사가 사비를 털어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서정일
지난해 10월, 전남 순천 조계산에서 등산로 옆에 초라하게 서있는 '가부좌 튼 모양의 나무' 하나를 발견하고 기사를 썼다. 그리고 6개월여가 지났다. 바쁜 일상 탓인 양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을 즈음 나무를 심고 가꾸자는 식목일이 다가오니 문득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길로 주섬주섬 걸쳐 입고 서둘러 올라간 조계산, 6개월여만의 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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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부좌 나무는 그때의 모습과는 전혀 달라보였다.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주위가 깨끗하게 정리된 것은 물론 함부로 사람의 손이 타지 않게끔 사방에 줄도 쳐져 있다. 그리고 한편엔 취재 때 알지 못했던, 그 지방 사람들에게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안내문 형식으로 함께 적어놓았다. 이 안내판을 만든 주인공도 바로 김배선 경사.

▲ 항상 차 트렁크엔 각종 장비를 가지고 다닌다는 김 경사는 못을 지팡이 앞에 달아놓은 이상한 물건을 내 보이면서 쓰레기 줍기 위해 만든것이라고 환하게 웃는다.
ⓒ 서정일
"부끄럽습니다.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라고 말하며 한사코 취재를 거부하는 김배선 경사. 하지만 자연을 내 이웃처럼 돌보고 가꾸는 자연사랑의 마음은 본받을 만한 점이라 거듭 설득하여 얘기를 시작했다.

2시간 가량 얘기했는데 인터뷰가 이렇게 즐거운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얘기는 하나 같이 금과 옥이다. 수집된 자료를 프린터해서 안내판을 만들어 설치하는 얘기는 꼭 무용담 같다.

김 경사가 이렇듯 사비를 털어 산에 이정표를 세우고 안내문을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3년 전의 일이다. 여수와 가까운 영취산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자신이 태어난 곳인 조계산에 이른다.

처음엔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길을 몰라 허둥대는 것을 보고 산행도를 만들었지만 하다 보니 유래나 전설 등도 알고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형마다 유래까지 찾아서 인쇄해 나눠주고 직접 현장에 설치도 해 놓는다.

▲ 이야기 도중 서류봉투에서 그동안 수집해 놓은 자료를 끄집어 내어 보여주는 김 경사, 산에 가서 오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는 자료는 앞뒤로 인쇄된 40여장의 제법 방대한 분량이다.
ⓒ 서정일
이런 일을 하면서 잘못 표기된 것, 그리고 잊혀져가는 이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면서, 특히 조계산 자락 중간지점을 송광사와 선암사라는 양대 사찰의 경계가 되는 지점이라 하여 옛날부터 '지경터'라 불렀다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더구나 근래에 그곳에 다리를 놨는데 전혀 엉뚱한 이름까지 붙여 지경터라는 이름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한참을 그렇게 설명하다 서류봉투에서 40여장에 달하는 인쇄물을 꺼내 보인다. 김 경사가 직접 수집하고 써 놓은 자료들이다.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그가 얼마나 조계산의 구석구석을 세밀히 관찰했나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걸으면서 시간을 잰 듯 구간마다 소요시간을 표시했으며 잣나무 숲을 표현할 땐 나무 모양으로, 대피소는 집 모양으로 깨알같이 그렸다. 등산로도 샛길까지 모두 표시했다. 한마디로 김 경사는 현대판 김정호였던 것이다.

▲ 현대판 김정호처럼 조계산과 영취산에 관해 꼼꼼히 자료를 수집했으며 자그마한 등산로까지 촘촘히 그렸다. 거리보다 시간이 중요하다고 느낀 듯 각 구간마다 소요시간을 표시해 놨다.
ⓒ 서정일
하지만 자료 수집하는 것은 그렇다고치더라도 안내판을 설치하고 유지보수하는 데는 돈이 많이 들지 않겠냐는 질문에 '집사람한테 산에 간다고 용돈을 탈 때면 눈치가 보인다'고 속내를 말한다.

3년여 동안 영취산에 20여개, 조계산에 100여개의 안내판을 설치했고 정기적으로 유지보수까지 한다고 하니 입을 다물 수 없다. 김 경사가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이런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다는 건 보통의 정성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더구나 쓰레기봉투까지 구입해서 등산로 요소요소에 비치해 둔다는 얘기를 들을 땐 사회에서 김 경사와 같은 사람들에게 좀더 관심을 가져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이번 식목일날도 그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산을 찾을 것이다. 여느 때처럼 쓰레기를 줍고 안내판을 손질하며 인쇄물을 나눠주면서 자연 사랑을 실천할 것이다. 여수해양경찰서 김배선 경사는 '가부좌 나무'가 맺어준 소중한 인연이다.

덧붙이는 글 | 여수해양경찰서 김배선 경사는 기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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