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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길이 아름다운 길. 영화 <서편제> 촬영 장소였다.
황토길이 아름다운 길. 영화 <서편제> 촬영 장소였다. ⓒ 박상건
지금은 가능한 산비탈 밭 언저리까지 혹은 묘지 앞길까지 포장하는 시대다. 그것이 그 마을과 자치단체의 부를 상징하며 행정 서비스의 잣대인양 인식될 정도여서 시골길은 추억의 오솔길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황토가 불거져 나온 울퉁불퉁하던 그 시골길이 좋았지 않던가.

얼마 전 남녘의 섬을 다녀왔는데 붉은 흙들이 푸른 들녘을 가로질러 아름다운 시골길의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어쩜 봄날의 들꽃과 푸른 보리밭 이랑들이 어깨동무하며 걸어갈 수 있게 한 것은 그 흙길이 서로의 이음새 역할을 해 준 탓이다.

흙길은 들판의 경계이면서 경계를 넘어서는 농촌 공동체 문화가 무엇인가를 상징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 섬의 면장과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 길은 곧 포장됩니다. 가능한 해변을 돌아볼 수 있는 모든 길은 올해 안에 포장할 계획입니다. 군에서 예산을 계속 배정해 준다고 하는데, 이제 더 포장할 길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정녕, 안타까운 것은 "가능한 다 포장하려는데 포장할 길이 없어 안타깝다"는 그 마음이라는 생각이 울컥, 저 바다의 파도처럼 끓어 올랐다가 물보라로 부서졌다. 한반도 최남단 외딴 섬마저 포장하는 문화를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염되지 않은 외딴 섬이나 오지를 찾아간 사람들은 살아 숨쉬는 자연의 숨소리를 듣고 싶어간 것이다.

물론 그 마을 단체장도 나름대로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생활 방식을 바꾸고 싶을 수 있겠지만 향토적 문화유산이 산재한 마을의 전통적 특성과 정서마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해 버린다면 지금 찾아간 관광객들이 다시 찾아갈지 만무하다.

아무튼, 그렇게 시골길들이 사라지고 있다. 시골길이 움푹 패인 탓에 자전거 바퀴에 자갈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자전거를 잘 탄 사람일지라도 그 돌멩이 하나에 곧잘 넘어지곤 했던 시골길. 이따금 논바닥으로 튀어간 돌을 논 주인이 일일이 걷어내는 불편도 있었지만, 곡괭이로 파 헤쳐도 뽑히지 않을 정도의 잡풀뙈기의 시골길은 잡초처럼 살아가던 끈끈한 농부들의 삶을 상징이기도 했다.

양조장에서 구판장으로 가는 길, 혹은 구판장에서 모내기 벼 베기를 하던 들길을 향하던 자전거 뒤 짐받이의 막걸리 통. 차바퀴 튜브를 잘라 만든 단단한 줄로 동여매여 있었고 들길은 통통 넘쳐 튀는 술맛에 취한 듯 비틀비틀 꼬불꼬불 강이나 들판을 따라 이어졌다.

지금이사 포클레인으로 직선 길을 첨단 문화로 삼는 시절이지만 지름길보다 둥그렇게 이어가던 시골길은 여기서 끝나는 것만 아니었다. 귀가하던 사립문 안 초가지붕도 기와지붕도 그것을 떠받치던 기둥도 마룻바닥도 그 앞의 절구도 밥주걱도 항아리도 살림살이 모든 것들이 곡선의 아름다운 무늬를 하고 있었다.

그런 농촌문화를 이끌던 주인공들이 할머니 고모 삼촌 등이었고 방학에 찾아가던 할머니 댁의 기억은 "아이고 우리 새끼"하며 늘 치마폭에 끌어안던 정겨움이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는 세대는 얼마쯤 될까?

"주모가 나와 섰다/술통들이 뛰어내린다/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라는. 배달한 자전거가 멈추면 구판장 아줌마가 반갑게 맞았고 신작로를 거쳐 들길을 거쳐 달려온 막걸리 자전거 길은 그 치마폭 앞에서 멈추었으니, 그 길 역시 치마폭으로 시계태엽 감기듯 감겨들어간 셈이다.

우리네 시골은 형제지간뿐 아니라 옆집도 앞집도 모두가 그렇게 반갑게 맞는 낙천주의를 사랑하며 이웃사촌으로 살았다. 손님도 혈육처럼 끌어안고 살아가던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가 농촌과 세상을 버팀목이 되었다.

도시 문화에 찌들어 지친 탓일까? 문득, 풀 비린내 나는 시골길을 향해 추억의 바퀴살을 돌리는데, 이 놈의 바퀴살이 좀체 멈추질 않는다. 뇌리를 파고든 기억의 길들이 사라질 줄 모른다. 수구초심! 인간의 이 지독한 향수병이라니…….

덧붙이는 글 | 박상건 기자는 91년 <민족과 지역>으로 등단한 시인이고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편집부장을 지냈고 현재는 <계간 섬> 발행인, 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여대 겸임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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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언론학박사, 한국기자협회 자정운동특별추진위원장,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한국잡지학회장, 국립등대박물관 운영위원을 지냈다. (사)섬문화연구소장, 동국대 겸임교수. 저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여행> <바다, 섬을 품다> <포구의 아침>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예비언론인을 위한 미디어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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