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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공원 독립관에 걸려 있는 결의대회와 일본의 독도 침략 행위 규탄 플래카드.
독립공원 독립관에 걸려 있는 결의대회와 일본의 독도 침략 행위 규탄 플래카드. ⓒ 신병철
그런데, 일본을 규탄함에 독립공원이 적당한 장소일까? 주최 측에서는 독립문과 독립관이 있는 독립공원이 우리의 항일독립 운동을 상징하는 장소라고 생각했나 보다. 독립관 앞에 ‘일본의 역사 왜곡 獨島 다케시마의날 폐기 촉구 결의대회’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큼직하게 붙어 있다. 옆에는 역시 ‘독도 다케시마의 날, 역사 교과서 왜곡 일본 정부 경거망동 30만 순국선열 영령들은 저주한다’라는 강력한 규탄 선언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그러나 이 독립공원에서 일본을 규탄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독립문과 독립협회 그리고 독립관은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우리 역사에서 우리의 독립의지를 키우기 위한 과정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이때의 독립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독립의 대상은 철저하게 중국 청나라였고, 뒤에는 러시아였다.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위해서 처음 1896년 조직했다. 독립문을 건립한 뒤에도 해산하지 않고 독립의식을 키우기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독립관도 지었다. 그런데 이때의 ‘독립’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었다. 침략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일본과 미국에 대한 경계는 어떤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현재의 독립문 모습, 원래 동남쪽으로 조금 아래쪽에 있었다.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앞에는 영은문 주초가 있다.
현재의 독립문 모습, 원래 동남쪽으로 조금 아래쪽에 있었다.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앞에는 영은문 주초가 있다. ⓒ 신병철
1876년 일본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맺은 불평등조약 강화도 조약의 제1조는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과는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이다. 얼핏 보기에 일본이 조선의 자주 주권을 확실하게 인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종주국 행세를 해오던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외교문서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독립문의 ‘독립’도 이것과 그대로 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시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에는 조선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본격적으로 대립했다. 중국의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일본은 밀리는 상황을 극복키 위한 비상수단을 썼다. 1895년 친러정책을 펴는 중심인물 중전 민씨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선의 정국을 장악했다.

독립공원에 있는 서재필 동상, 독립협회 주도 인물 중 하나. 미국으로 밀항하여 가장 성공한 동양인 젊은이가 되었고, 이름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었다. 죽을 때까지 미국인으로 살았다.
독립공원에 있는 서재필 동상, 독립협회 주도 인물 중 하나. 미국으로 밀항하여 가장 성공한 동양인 젊은이가 되었고, 이름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었다. 죽을 때까지 미국인으로 살았다. ⓒ 신병철
곧 이어 일본은 갑오개혁에 이어 을미개혁을 단행했다. 단발령이 내려졌고, 지방의 양반 유생들은 강하게 저항했다.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884년 갑신정변 주역들은 역적이 되어 일본으로 미국으로 도망 다녔다. 김옥균은 끝내 피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머지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1896년 친일정권 등장과 함께 속속들이 입국했다. 박영효의 권고를 받은 서재필도 이때 돌아왔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때 약관의 나이로 군사총책을 맡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소극적 자세로 청군을 막는데 실패했다. 일본군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미국으로 밀항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성공한 동양인 젊은이가 되었다. 이름도 필립 제이슨이라 바꿨다. 이후 두 차례나 우리 나라에 입국했지만, 서재필은 항상 필립 제이슨 혹은 피제손이라는 이름만 사용하였다. 서재필은 박영효의 권고와 미국 영주권 획득에 따른 미국인으로서의 신분보장을 받고 조선으로 ‘입국’했다.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이 팽팽한 상황 속에서 친러·친일파들이 합세하여 독립협회를 만들고 이끌어갔다. 후반에 러시아의 침탈 반대운동을 벌여 나갔다. 러시아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내정에 간섭했기 때문이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짓고 독립협회를 주축으로 독립신문도 만드는 등, 민권신장 활동을 펴나갔다. 일본과 미국의 선진적 정치체제, 민주사회의 모습을 조선에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의회도 구성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들이 가장 안타까워 한 것은 조선 사람들이 선진 문물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저급하다는 점이었다. 일본과 미국과 같은 민주시민사회에 대한 인식 고양을 위해서 독립신문도 만들었다. 이들은 모델은 철저하게 일본과 미국이었다.

영은문 돌 기둥, 중국 황제의 사신을 맞이하는 문이었다. 청일전쟁때 허물어졌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지금은 독립문 앞에 볼품없이 서 있다.
영은문 돌 기둥, 중국 황제의 사신을 맞이하는 문이었다. 청일전쟁때 허물어졌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지금은 독립문 앞에 볼품없이 서 있다. ⓒ 신병철
가장 큰 장애는 고리타분한(?) 양반들이었다. 성리학과 신분제를 근거로 한 근왕적 수구세력이었다. 단발령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위정척사세력이었다. 이들의 세계관은 아직도 중국 중심에 머물러 있었다. 새로운 시민사회 구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중국으로부터 의식적 독립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서대문 밖에는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문이 있었다. ‘은혜로운 중국 황제가 보낸 사신을 맞이하는 문’(迎恩門)이었다. 이 영은문이 청일전쟁 때 허물어졌다. 독립협회 사람들은 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했다. 서구문화를 수용하고 본받겠다는 의식 아래 프랑스 개선문을 본땄다고 한다. 지금 영은문의 돌기둥만이 덩그렇게 독립문 앞에 남아 있다.

왕비를 살해하는 만행을 당한 고종은 일본이 무서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1년 동안 그곳에서 정무를 보았다.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우리의 이권이 러시아, 일본, 미국으로 넘어갔다. 독립협회는 이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유독 러시아로 넘어가는 이권에 대해서만 철저하게 반대했다. 미국과 일본으로 더 많은 이권을 빼앗겼음에도 러시아만 문제 삼았다.

순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중국으로 벗어나려는 의식이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독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순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중국으로 벗어나려는 의식이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독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고종은 아관파천 1년을 보내고 여론에 못 이겨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대외적으로 주권을 천명하기 위해 나라 이름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라 칭했다. 중전 민씨의 시신도 없는 장례식도 사후 1년 반이나 지난 이때 치르고 이름도 명성황후로 붙였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정부의 돈으로 발간했다. 순한글 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이 순한글이 되었던 것도 중국글자 한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민중들에게 모두 읽히기 위함이기도 했다. 영문판도 함께 발간했다. 한자를 버리고 영어로 신문을 만든 의도도 독립협회의 ‘독립’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의식은 미국과 일본에 대한 한없는 짝사랑 타령으로 이어진다.

<독립신문>의 의병에 대한 기사, 비적(匪敵)으로 규정하고 근대화에 장애물로 인식하고 있다.
<독립신문>의 의병에 대한 기사, 비적(匪敵)으로 규정하고 근대화에 장애물로 인식하고 있다.
“30년 이래에 일본이 옛법을 고치고 새 법을 좇아서 대소 천만 가지 사건을 태서의 규모를 모본하여, 지금 와서는 구미 각국에 뒤지지 않게 문명된 일은 세계 사람이 흠탄하는 바요 대한 인민이 부러워하고 본받을 일이라….”(1898년 12월 6일(화))

또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노예를 해방한 미국에 대해서도 왜곡된 시각을 드러냈다.

“다만 이 일(노예해방)뿐이 아니요, 이 나라는 의리로 주장을 삼고 정치상과 권리상의 모든 일들을 천리와 인정에 합당하게 만든 풍속과 사업이 많은 고로, 천복을 받아 지금 이 나라가 부하기도 세계에 제일이요 화평한 복을 누리기도 세계에 제일이라. 이 나라 사람들이 그 종들을 속량한 것은 남을 사람으로 대접해야 나도 남에게 사람으로 대접을 받겠으니까, 그 사람들을 넉넉히 잡아다가 부릴 계제가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사람된 권리를 빼앗지 않고 동동으로 대접하자는 경계로되….”(1897년 10월 16일(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국민성을 한없이 칭송하고 있으며, 미국의 노예해방을 의리 숭상의 결과로 판단하고 있다. 나아가 충분히 사람들을 잡아다 노예로 부릴 수 있음에도 불쌍하게 당하는 자들의 인권을 생각하여 평등하게 대한다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일본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에 대해서는 완전한 판단착오를 일으키고 있다.

“조선은 세계 만방이 오늘날 독립국으로 승인하여 주어 조선사람이 어떤 나라에게 조선을 차지하라고 빌지만 않는다면 차지할 나라가 없을지라. 그런고로 조선서는 해육군을 많이 길러 외국이 침범하는 것을 막을 까닭도 없고 다만 국중에 해육군이 조금 있어 동학이나 의병같은 토비(도둑떼)나 진정시킬 만하였으면 넉넉한지라”

참으로 한심한 외세관이라 하겠다.

광화문 사거리 칭경비각 부근에서 기미년에 만세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울 시민들. 일본의 독도 침략 행위 규탄 시위는 대한문 앞 시청광장, 종로 3가 3·1공원 등 항일 운동이 일어난 곳에서 벌임이 옳다.
광화문 사거리 칭경비각 부근에서 기미년에 만세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울 시민들. 일본의 독도 침략 행위 규탄 시위는 대한문 앞 시청광장, 종로 3가 3·1공원 등 항일 운동이 일어난 곳에서 벌임이 옳다.
나아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우리 민중의 무력항쟁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왜곡했다. 일본의 감정을 건드리지 말자고 거듭 목청을 돋웠다. 동학농민항쟁과 의병들의 대일 항쟁을 무식의 소치로 깔아 뭉갰다. 친일 친미적 성향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이런 독립문과 독립협회가 있는 곳에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독립운동 하면 우리는 으레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로부터 독립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독립협회, 독립문의 ‘독립’의 뜻은 항일독립운동의 독립과는 전혀 다르다. 독립공원에서 일본 침략성에 대한 규탄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은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본의 침략 행위 규탄은 어디에서 벌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 3·1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덕수궁 대한문 앞, 시청 광장, 혹은 종로의 3·1공원과 종묘 공원이 역시 가장 적당하리라 생각한다. 이곳은 현재 서울에서 시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독도를 점탈하려는 일본의 반인간적 폭거를 규탄하는 장소는 바로 항일운동이 꽃핀 항일공원이어야 한다.

시위나 집회 혹은 결의대회가 장소와 연관된다면 제대로 된 곳을 찾아야 한다. 일본 규탄 집회 장소로 독립문, 독립관은 단연코 안 된다. 일본과 미국에 대하여 한없는 짝사랑의 생각을 가지고 청국으로부터 혹은 봉건적 의식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독립공원에서 항일 규탄시위는 있을 수 없다. 그 독립과 지금의 독립은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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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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