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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 동상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 동상 ⓒ 정범래
이때부터 '남기관'이라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위한 정보기관이 등장하게 되는데 따낀 당을 중심으로 한 반영 무장독립운동은 국민적인 지지와 관심으로 그 세력을 뻗쳐나가게 됩니다. 영국식민지 정부는 이들의 독립 운동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고 따낀당의 주요 인사들은 대거 체포 투옥되고 말지요.

이 때 아웅산 장군은 30인의 동지들을 이끌고 일본의 대 태평양 정보기관인 '남기관'의 도움을 받으며 당시 일본령이었던 해남도에서 군사훈련을 받게 됩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영국과 미국은 일본과 적대 관계에 있던 장개석 군에게 막대한 군비와 군용 물자를 원조하고 있었습니다. 군수물자들은 영국령 버마를 통과하여 중국으로 들어가는 루트를 선택했는데 이것이 "죽음의 철도" 즉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한 버마로드입니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원한 일본에게는 버마로드를 차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전략이었습니다. 이 때 미얀마독립운동 지도자 아웅산 장군을 비롯한 30인의 독립지사들이 일본에 도움을 청했으니 일본으로서는 굉장한 우군을 얻게 된 셈이었지요.

일본은 남기관을 통해 아웅산 장군과 30인의 지사를 스즈키 게이오 대령의 지도 하에 훈련시키게 됩니다.

남기관의 활동 계획은 이렇습니다.

1. 무장 독립 운동의 핵심인 아웅산 장군과 30인의 지사들에게 무장 봉기에 필요한 군사 교육을 시킬 것.
2. 게릴라훈련이 끝난 이들을 다시 버마에 잠입시켜 반영 무장 독립 운동을 일으키고 버마독립 정부의 수립을 선포할 것.
3. 장개석을 지원한 버마로드를 차단할 것

1941년 일본의 소위 대동아 전쟁의 개전과 동시에 태국의 방콕에서 30인의 지사를 중심으로 버마독립의용군이 결성됐습니다. 일본군에 의해 엄격한 훈련을 받았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버마독립의용군은 일본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스즈키 게이오 대령을 사령관으로 하여 버마로 진군하게 됩니다.

일본 군대를 등에 업고 진군한 버마독립의용군은 3개월만에 영군군을 버마에서 몰아내고 1943년 8월 1일 독립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버마로드의 차단이 목적일 뿐 버마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애초 약속과는 달리 버마에서 친일인사로 하여금 군정을 실시하고 영국보다도 더한 악랄한 식민통치를 자행하였습니다.

이때 일본군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징집한 일부 군인들을 일본 군대의 첨병에 서게 하였으며 이들로 하여금 버마 민중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잔인한 일본 군대를 증오하던 버마 민중들에게 그 군인들은 일본 본토인이 아닌 조선인들이라서 그렇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미얀마의 노년층들은 아직까지도 약속을 저버리고 식민통치를 행한 일본보다 그 앞잡이로서의 한국(조선)사람들을 더 미워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애초 약속했던 버마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영국보다 더한 악랄한 식민통치를 자행하자 독립영웅인 아웅산 장군은 연합군인 영국의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영국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아웅산 등 미얀마 독립의용군의 안내를 받아 1945년 3월 또 다시 버마로 진군하여 일본을 패퇴시킵니다.

이 사건에 대해 현재까지 일본은 아웅산 장군이 신의를 버리고 일본을 배신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을 몰아낸 아웅산 장군은 10만명에 달하는 미얀마 독립의용군들을 세력으로 해서 영국과 독립교섭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1948년 1월 4일 영국은 버마독립을 인정하고 버마는 70여년의 지겨운 식민통치를 끊어버리고 버마 민중의 힘으로 독립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아웅산 장군은 그토록 염원하던 독립의 날을 보지 못하고 독립 5개월 전인 1947년 7월 19일 암살되고 맙니다.

미얀마의 독립영웅 "아웅산"장군과 독립투사 7인이 잠들어 있는 아웅산 국립묘지
미얀마의 독립영웅 "아웅산"장군과 독립투사 7인이 잠들어 있는 아웅산 국립묘지 ⓒ 정범래
미얀마의 독립기념일은 이런 연유로 해서 1943년 8월 1일이 아닌 1948년 1월 4일이 된 것입니다. 일본은 현재도 미얀마의 독립을 자기들이 도와주어서 된 것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번에 또 다시 역사왜곡으로 불거진 일본의 역사교과서에도 일본이 미얀마의 독립을 촉진시켰다고 기술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버마전선에서의 전투가 정치, 경제적으로 족쇄를 채운 미- 영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싸운 정당성을 가진 전쟁이었다고 말합니다.

현재 미얀마 사람들은 그들의 지배 종교인 소승불교 탓으로 인해 일본제국주의를 미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60여년에 달한 영국식민통치 기간보다 그 기간이 불과 3년이 안된 일제 식민 통치시대 때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죽어갔다는 사실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만 역사적 사실은 사실이다"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미얀마에도 한승조 명예교수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기간에 수상을 지냈던 바모는 영군에서 출판된 그의 저서 <버마의 날이 밝았다>에서 "진정한 버마의 독립일은 1948년 1월 4일이 아닌 1943년 8월 1일이다. 또 미얀마의 진정한 해방자는 버마민중도 아니고 연합군도 아닌 대 일본 군 토조우 대장과 대 일본제국 정부였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이런 반민족적인 언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현재 미얀마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는 약 400여명 정도 됩니다. 800여명의 한인들이 미얀마 거주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적은 수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미얀마 사람들이 일본 덕분에 영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할 수 있었고 미얀마 사람들은 일본에 감사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미얀마 거주 일본 사람들은 모두 이런 역사관을 갖고 있더군요.

미얀마는 뛰어난 지략가이며 외교가인 아웅산 장군(아웅산 수지여사의 부친)의 영도 하에 미얀마 민중들의 힘으로 자주독립을 했습니다. 자주독립을 이루는 과정에서 일본의 힘과 영국의 힘을 이용한 것뿐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고 왜곡해 군국주의를 부활시켜 옛날의 영광을 재현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일본과 일본인들이 하루 빨리 집단 최면에서 깨어나 자기들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기를 염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일본의 역사왜곡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런 '불치병'은 미얀마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범 세계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세계관을 고발합니다.
- 기자의 블로그 : http://blog.ohmynews.com/myanmar
                  http://blog.chosun.com/myanmar  
- 홈페이지 : http://home.freechal.com/mya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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