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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이라크 무장 세력에게 납치되었다 풀려난 이탈리아의 줄리아나 스그레나 기자와 그녀를 보호하던 비밀요원들이 미군의 총격을 받은 사건이 발생했다. 스그레나 일행은 석방 직후, 바그다드 공항으로 향하는 중이었으며 미군 검문소를 지나칠 때 그들이 탄 차량 위로 미군의 총탄 세례가 퍼부어졌다고 한다. 이때 스그레나는 부상을 입고, 그녀를 구출했던 비밀요원 1명은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이탈리아의 굳건한 파병 동맹이 흔들리고 있다. 두 나라는 공동조사를 합의했지만 미군의 만행에 분노하는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 반미 의식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3000명의 이라크 파병 이탈리아군 부대와 헌병대 예산안에 대한 투표를 앞두고 있는 이탈리아 정부는 다시금 국민들의 이라크 파병부대 철군 요구에 직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상황은 다른 파병국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치고 있어 국내 언론들도 이번 미군 총격 사건을 자세히 보도하였다.

선정적 표제 설정보다 공정한 보도를

伊 외무 “오인사격 책임자 처벌을” [경향신문 3월 10일자 기사]
“미국 책임져야” 이라크 미군, 이탈리아 인질 오인사격 [한겨레신문 3월 7일자 기사]
伊 여기자 美軍에 피격 반미확산 [한국일보 3월 7일자 기사]
伊여기자-미군 누가 거짓말하나 [동아일보 3월 8일자 기사]
정지신호 무시? 의도된 총격? 伊여기자 미군총격 진실은 [조선일보 3월 8일자 기사]


경향, 한국, 한겨레 등의 신문들이 미군의 총격에 대해 비판조로 표제를 뽑은 데 반해 조선, 동아의 표제가 유독 눈에 띈다. 선정적인 타블로이드판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이 표제에서, 두 신문은 미군과 이탈리아 스그레나 기자의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는 것을 ‘거짓말’과 ‘진실’이라는 표현으로 부각시켜 독자의 눈길을 잡아끌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이탈리아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으니 둘 중 어느 한쪽의 주장은 거짓인 게 틀림없지만,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이 같은 선정적인 표제로 독자의 관심을 유발하기보다 거짓 주장을 가려내고 그 숨은 의도를 파악하여 독자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조선일보는 거짓 주장을 가려내기는커녕 사실 전달에 있어서도 형평성을 잃고 있다.

미군은 4일 밤 스그레나 기자가 탄 차량이 바그다드 공항으로 이어지는 길을 ‘빠른 속도’로 돌진했고, 미군 검문소가 경고등을 켜고 손을 흔들어 정지 표시를 했는데도 응하지 않아 경고사격 후 총격을 가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좌파 신문 ‘일 마니페스토’ 기자인 스그레나는 6일 인터뷰에서 “미군이 의도적으로 총격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미군측 설명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미국은 인질범과의 협상에 반대하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이를 저지하려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3월 8일자 기사 中)

이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미군 측의 주장은 상세한 정황 설명까지 곁들어 실은 데 반해, 스그레나의 주장은 근거없이 의도적인 총격 ‘가능성’만을 언급하는 것처럼 싣고 있어 독자들은 객관적인 판단의 근거조차 얻을 수 없다. 이는 같은 인터뷰를 인용한 경향신문이 스그레나의 주장을 비교적 상세하게 실은 것과도 비교가 된다.

줄리아나 스그레나 기자는 6일 자신이 속한 좌파계열 일간지 ‘일 마니페스토’에 쓴 기사와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미군의 오인사격 해명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스그레나는 “우리가 차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중이라는 사실을 이탈리아 대사관에 알렸고, 이는 분명 미군에 통보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그는 또 “미군측은 검문소에서 수신호와 불빛으로 우리가 탄 차에 정지신호를 보냈으나 차량이 오히려 속도를 높여 발포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검문소에는 불빛도 신호도 없었다”면서 고의적 발포 의혹을 제기했다. (경향신문 3월 8일자 기사 中)

조선동아, 미군에게 면죄부를 주려는가

워싱턴포스트는 7일 “이라크 내 미군들이 검문소에서 민간인들이 탄 차량을 오인사격해 숨지게 한 사례들이 과거에도 많았다”며, 미군이 스그레나 기자의 차량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는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신문은 “이번 사건이 일어난 가장 결정적 이유는 스그레나 구조팀과 미군 검문소 간에 사전 연락이나 협조체계가 없었던 것”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3월 8일자 기사 中)

또한 조선일보는 “이번 사건이 일어난 가장 결정적 이유는 스그레나 구조팀과 미군 검문소 간에 사전 연락이나 협조체계가 없었던 것”이라는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를 인용함으로써 이번 사건에 대한 미군의 주장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다. 인질 석방 작전이 사전에 미군에 통보됐다는 이탈리아의 주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미군 측의 주장처럼 이번 일이 설사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미군이 민간인을 향해 총기를 난사한 것은 명백한 죄악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가 일부 인정한 것처럼 그간 이라크에서는 미군이 민간인을 사살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고, 이라크 민중들은 “이라크 도로는 공동묘지(중앙일보 3월 9일 보도)”라며 고통을 호소해왔다. 이번 미군의 이탈리아 기자 총격 사건도 미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의한 민간인 피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선정적인 표제로 독자들을 현혹하면서 정작 사실 보도에 소홀히 하는 것은 이라크에서 끊임없이 민간인을 살상하고 있는 미군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행위나 다름없다.

이탈리아의 줄리아나 스그레나 기자는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라크 전쟁의 참상을 알려내기 위한 취재활동을 벌여왔다. 이러한 그녀의 활동 때문에 미군이 그녀를 고의적으로 공격했다는 주장 또한 제기되고 있다. 그녀가 대변했던 희생자의 입장에 스스로 처하게 됨으로써 이번 전쟁의 부조리함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스그레나 기자의 기자 정신을 조선 동아에게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일까.

이제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날 때

스그레나 사건 이후, 이번엔 불가리아의 군인이 미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한 일이 발생했다. 이라크에 있는 미국의 동맹국들은 이제 이라크의 저항세력뿐 아니라 미군까지 경계해야 자국의 군인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도 미국의 절친한 동맹국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한 채 파병을 강행하고 있는 노무현 정권이 이번 사건에서도 교훈을 찾지 못한다면 더 이상 스그레나 같은 기자가 없는 우리의 척박한 현실을 탓하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 동아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상황이 바로 이러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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