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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바른골 얼음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바른골 얼음 ⓒ 성락
밖으로 나왔다. 바람은 여전한데 상큼한 느낌이다. 차지 않은 시원한 바람, 봄바람이다. 빗방울이 간간이 얼굴을 때린다. 이 비가 지나가면 눈은 대부분 녹을 것이다. 지당골 계곡에서는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바른골 계곡은 아직 두터운 얼음이 그대로인데. 정자골의 주 계곡으로서 나름의 자존심을 세우나보다.

봄의 모습
봄의 모습 ⓒ 성락
아버지는 아침 일찍 낯선 도구들을 챙기셨다. 고로쇠 물을 받기 위한 드릴, 비닐봉지, 호스 등이다. 천장 위 용마루에 보관돼 있던 물통들을 하나씩 내려 개울물로 씻어낸다.

"오늘은 틀렸는데. 날씨가 흐리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면 고로쇠 물이 안나오거든."

물 받기가 틀렸다고 하시면서도 아버지는 도구들을 챙겨 산으로 향했다. 물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이미 남쪽 지방의 고로쇠 물 소식이 TV를 통해 전해진 지 여러 날 지났지만 이곳은 이제 시작이다. 아버지는 해마다 때를 정확히 맞춰 식구들이 먹을 만큼의 고로쇠 물을 마련하셨다.

개울물에 빨래하시는 어머니. '빨래는 뭐니뭐니 해도 펑펑 두들겨야...'
개울물에 빨래하시는 어머니. '빨래는 뭐니뭐니 해도 펑펑 두들겨야...' ⓒ 성락
어머니는 모처럼 넉넉해진 개울물을 이용해 밀린 빨래를 하신다. '펑, 펑, 펑, 펑' 빨래방망이의 사정없는 움직임에 겨우내 쌓인 마음의 때까지 모두 빠져나가는 듯 시원하다. 고인 물에 빨래를 한번 담가 휘두르자 뽀얀 비눗물이 빠져나왔다가 얼음장 밑으로 사라지고, 다시 맑은 물로 채워진다.

어머니는 한겨울에도 종종 이 빨래터를 이용하셨다. 물 흐름이 센 이곳은 매일 얼음을 깨주면 세 식구의 빨래 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세탁기가 있지만 미덥지 않은 눈치시다.

"빨래는 뭐니뭐니 해도 방망이로 '펑펑' 두들겨야 때가 잘 지지."

밭에 나가 보았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찌르르' 녹았다. 바로 엊그제만 해도 눈 속에 묻혀 있었던 밭에 어느새 파릇파릇한 풀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정말 빠른 게 봄 오는 속도인 것 같다. 머지않아 냉이며 달래, 씀바귀 등이 줏대 없는 사람들의 봄 입맛을 돋우게 될 것이다.

양지바른 뒤꼍에도 어느새 봄이 찾아왔다. 잘려진 쑥대 밑둥치에 수줍게 돋아 오른 어린 쑥잎이 반갑기만 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른 잔풀들을 헤쳐 보았다. 어린 시절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할미꽃을 늘 이곳에서 발견했었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내밀던 할미꽃은 다음날이면 어느새 활짝 펴 어린 동심을 설레게 했었다.

수줍게 어린 싹을 틔운 쑥.
수줍게 어린 싹을 틔운 쑥. ⓒ 성락
괜한 욕심을 부린 것 같아 금방 민망해진다. 할미꽃은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봄이 오는 모습을 확인케 해 주었던 할미꽃이 없어져서인지 계절도 아직 겨울과 봄을 헷갈리게 한다.

뒤꼍에서 발견한 말바다리 집
뒤꼍에서 발견한 말바다리 집 ⓒ 성락
봄의 자취를 목말라하며 이리저리 옮기던 눈에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아이 머리통만 한 둥근 모양의 바가지 같은 것이 나뭇가지를 의지한 채 매달려 있다. 가까이 가 보았다. 벌집이다. 크기로 보아 '말바다리(말벌의 강원도 사투리)'가 살던 집인 것 같다. 산짐승이 꿀을 훔쳐 먹느라 가운데는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꿀을 저장했던 육각 모양의 창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 애벌레가 있었던 방들은 모두 비어 있다. 남아서 애벌레와 집을 지키던 벌들은 추위에 모두 죽었을 것이다. 애벌레의 먹이로 창고 가득 채웠던 꿀은 모두 강탈당해 버렸을 것이다.

"뒤꼍에 말바다리 집이 매달려 있네요. 머리통만 하겠는데요."
"아이고, 그게 언제부터 있었나? 참 귀한 건데."
"꿀도 없고 텅 비었는데 뭣에 쓸 수 있을라고요?"
"아니다. 벌집 채로 푹 삶아서 먹으면 머리 아픈데 특효라더라."

벌집은 그대로 놔두었다. 왠지 그냥 그곳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잘은 모르지만 봄이 오면 새 벌떼들이 굳이 힘들게 집 짓는 수고를 덜고 그곳에 정착할 수도 있을 것이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생겼다.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 어느새 나도 동화된 것일까.

말바다리 집 내부. 꿀 창고와 애벌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말바다리 집 내부. 꿀 창고와 애벌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 성락
사실 벌은 내게 썩 반가운 곤충이 아니다. 어린 시절 벌에게 시달렸던 기억이 유난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뒤꼍만 해도 벌에 얽힌 큰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직 잊혀지지 않는 걸 보면 그 어린 나이에 겪은 고통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세 살 정도였을 때라고 한다. 뒤꼍에서 산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벌레가 잘 먹지 않고 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지금은 충북 음성에 살고 계시는 작은 누님이 나를 등에 업고 복숭아를 따던 중, 땅 속에 집을 짓고 사는 '땡삐(땅벌)'라는 벌의 집 입구를 건드린 것.

두어 방 쏘인 누님은 혼비백산 세 살배기 나를 그대로 팽개친 채 줄행랑을 쳤고, 그곳에 혼자 남은 나는 속수무책으로 '땡삐'들의 집중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비명을 듣고 밭에서 달려온 아버지가 머리통에 노랗게 달라붙은 '땡삐'들을 쫒으며 구출했으나, 나는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잘 띄운 메주로 장을 담갔습니다.
잘 띄운 메주로 장을 담갔습니다. ⓒ 성락
장독대에서 된장을 가져다 온 머리통에 바르고 한참을 지나서야 깨어났는데, 지금 생각하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는 아찔한 사건이었다. 작년 사슴먹이를 베다가 손등을 벌에 쏘였지만 그다지 크게 부어오르지 않고 넘어갔는데, 아마 그 때 벌 독에 대한 면역이 생겨서인지도 모르겠다.

싹틔울 준비 끝. 두릅나무
싹틔울 준비 끝. 두릅나무 ⓒ 성락
얼마나 많은 비가 오려는지 꽤 뜸을 들인다. 곧 터질 것 같은 먹구름으로 한낮인데도 사방이 어둑하다. '겉캐(녹아내린 얼음이 다시 얼면서 두꺼운 얼음 층을 만들어내는 현상)' 두께만큼 장마물이 나간다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봄맞이 첫 비가 만만찮게 내릴 모양이다.

얼음장 밑으로 봄이 오고 있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봄이 오고 있습니다. ⓒ 성락
강원도 두메산골에도 이제 봄은 완연하다. 아직 곳곳에 남아 있는 눈도 봄의 한 부분이다. 머지않아 봄나물과 꽃망울들이 봄을 완성시킬 것이다. 들녘에는 농사꾼들의 포부가 정성스레 뿌려질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지금 봄비를 무던히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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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지키며 각종 단체에서 닥치는대로 일하는 지역 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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