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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 보수 잡지에 실린 한승조 전 고려대 명예교수의 글이 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다. 기사 내용이 워낙 놀라운 것이어서, 솔직히, 처음에는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A4 9매에 달하는 그 글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경악'이라는 말의 뜻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문제의 글은 다음 세 가지 주장을 담고 있다. 1) 현재 추진되고 있는 과거사 규명 노력은 '좌파 세력'의 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한 잘못된 일이며, 2) 일제 식민지 지배는 불행 중 다행인 바 그 혜택을 고마워해야 하고, 3) 일본군 성노예 문제 등에 대한 우리 국민의 배상 요구나 반일ㆍ반미 감정은 '못난 국민성에 기초한 저질 행위'라는 것이다.

일본 극우 인사들의 망언은 망언 축에도 못 끼게 될 정도이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민족정기를 내세우는 유명 사립대의 명예교수이자 '자유'와 '시민'을 앞세우는 단체의 공동대표 직함을 지닌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사실 앞에서는 아연실색, 할 말을 찾기 어렵다. 결과적인 주장이 충격적인 것도 그렇지만, 언어의 폭력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논리의 비약과 억지 때문에도 그러하다.

그의 첫째 주장에는, 일제에 가장 극렬하게 대립한 것이 공산세력이고, 친일 청산에 앞장선 것 또한 좌파이며, 과거사를 구명하자며 친일세력을 몰아대는 386세대와 노무현 정권 또한 좌파라는 세 가지 생각이 서로 얽혀 바탕을 이루고 있다.

민주화 세력을 친북 공산주의 집단으로 매도하는 폭력적인 규정에서부터 그는 사리분별을 잃고 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모두를 동일한 집단으로 규정한 뒤에, 맹목적이고 심정적이며 시효가 끝난 반공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친일 청산 및 과거사 규명 시도에 저주를 퍼붓고 있을 뿐이다.

보수언론조차 비판 글을 열지 않을 수 없게 한 둘째 주장은, 턱없는 가정에 기초하여 망언의 극을 달리고 있다.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공산치하에서 더 끔찍한 만행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라면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천만다행이며 저주할 일이기보다는 도리어 축복이며 일본인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사유는 될지언정 일정(日政) 35년 동안 일본에게 저항하지 않고 협력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것 때문에 나무라고 규탄하거나 죄인 취급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거짓말이나 망언은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 정체가 폭로되는 법이니, 그의 주장을 이렇게 그대로 옮겨온 것만으로도 비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생각은, 민족-국가가 멸망하지 않고 존속ㆍ발전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가져야 하는 정치적 주체성이라는 가치 자체를 스스로 내던진 상태에서나 가능한 진술이기 때문에 망령된 것이다.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의 면에서 볼 때, 이러한 말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나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의 주장은 말 그대로 '매국적'이며 '몰주체적'인 것이다.

이상에 이어져서, 자기 민족에 대한 멸시와 폄하, 비난이 쏟아져 나온다. 진보세력 일반에게 해질 대로 해진 빨간 보자기를 덮어씌우는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그는 우리의 국민성 자체가 저열한 것이라고 침을 뱉는다. 일본 식민지배가 가져다 준 '은혜적인 측면'을 부정하고, 주체사상에 휘둘려 무식하게도 반일-반미 감정에 빠져 있으며, '피해자도 얼마 안 되는' 정신대 문제로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는 '사악함과 어리석음'에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면, 이 글을 이끌고 가는 힘이 광기밖에 없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이런 주장이 미친 것이라 할 궁극적인 이유는, '나'와 '우리'를 버리고,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의 시선에서만 사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패권주의적인 외세를 편드는 자기는 옳고, 자기가 속한 민족 전체도 그들이 세운 정부도 완전히 잘못되었다니 제정신을 갖고 한 말이라 보기 어렵다. 그가 10대 때 받아들였을 황국신민화 교육의 위력이 이토록 엄청난 것인지, 그동안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의 나쁜 영향이 이토록 무서운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 모르지만, 모골이 송연해진다는 말은 이런 때 써야 할 듯싶다.

약육강식의 시대든 평화공존의 시대든, 사회와 국가의 문제는 주체와 주권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을 보존ㆍ발전시키든 그 반대든, 주체성과 주권에 대한 지향을 버리고서는 진정한 상호관계는 물론이고 자신을 유지할 수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 수립 시도는 위험하고 무식한 저질 행위라 매도하면서 일본 식민 지배자의 시선에서 사태를 왜곡하는 것은, 우리 민족 구성원의 태도라 할 수 없다.

그의 글에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대하면서' '사태를 개선시키려는' 자세 자체가 없다. 자신의 민족과 사회에 대한 애정이 없는 까닭이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한승조씨의 생각은, 드러나고 남겨진 역사적 자료의 바깥이자 지층인 우리 현실을 돌보지 못하고 객관주의의 미신에 현혹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불철저한 의식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북매일신문(2005.3.10)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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