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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0월 13일 뉴욕 허드슨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는 루즈벨트 전 미 대통령
1930년 10월 13일 뉴욕 허드슨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는 루즈벨트 전 미 대통령
39세의 나이에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가 다시 정계로 복귀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사 신체적 건강을 회복한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고려할 때 그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으로 보였다. 여생을 휴양지에서 지내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처럼 보였고, 다들 루즈벨트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장애를 딛고 선 불굴의 의지를 국민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그에게서 미국인들은 대공황을 딛고 이겨낼 희망을 보게 된다. 1933년 미국 제32대 대통령에 취임한 루즈벨트는 대공황의 고통에 시달리는 미국인들에게 선언한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오직 두려움뿐입니다.'

루즈벨트는 진정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불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경제상황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던 1935년 초, 그는 대통령 직속으로 기업의 구조개혁을 위한 위원회를 만든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청와대에 재벌개혁위원회를 설치한 것이다. 6개월간의 치열한 논의를 거쳐 1935년 6월 그는 세금으로 재벌을 해체하겠다고 선언한다. 대공황으로 경제가 파탄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를 1년 여 남겨 놓은 시점에서 그는 자본과의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재벌개혁, 조세강화로 부자들의 저항이 거셌지만

같은 시기 그는 부자들에 대한 조세를 강화한다. 그는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보살피지 않는 부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공황이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걷어 국가부흥계획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아주 기본적인 형태의 누진적 소득세였지만, 당시로서는 부유세라고 불릴 정도로 부자들의 반감이 거셌다.

조세를 통한 재벌해체 정책은 큰 효과를 거두었다. 당시 미국의 기업집단은 현재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삼성그룹보다는 단순하고 엘지그룹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계열사구조를 가진 피라미드식 기업집단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루즈벨트 정책의 핵심인 계열사 배당금에 대한 차등과세는 많은 기업의 출자를 해소하도록 유도했다.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이 법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한국의 재벌과 같은 복잡한 구조의 기업집단을 찾아볼 수 없다. 루즈벨트의 선각자적 혜안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일부 기업들은 계열사 구조를 단순화한 후에는 배당을 하지 않아 루즈벨트의 정책을 무력화시키고자 했다. 루즈벨트는 집요했다. 1936년에는 배당을 하지 않고 내부에 유보하는 이익에 대해 중과세하는 법안을 마련할 정도였다. 이 법안은 지나치게 기업의 의사결정을 규제한다는 비판 때문에 곧 폐지되었지만, 기업의 불법적 행위를 용납지 않겠다는 루즈벨트의 의지를 충분히 알리는 효과가 있었다.

국민을 위한 개혁이 되어야

요즈음 한국 정치인들의 기준에서 보면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자본과의 전쟁을 선언하고 그를 집행하는 행위는 정치적 자살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압도적 표차로 재선에 성공한다. 재선뿐 아니라 3선, 4선에도 성공하여 그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의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불행히도 격무로 인해 병을 얻어 마지막 임기는 채우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루즈벨트의 의지와 함께 그의 합리성을 선택했다. 재선 후 루즈벨트는 위헌 판결로 경제부흥 정책을 방해했던 대법원의 구조를 바꾸려고 했으나, 이것이 3권 분립을 해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여론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 사례를 통해 미국인들이 분별력을 유지하며 루즈벨트를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위협하는 상황에서 대공황의 고통을 겪고 있던 미국인들은 새로운 자본주의를 원했던 것이고, 루즈벨트는 그 길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루즈벨트가 자신의 개혁정책을 국민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변정담이라는 라디오대담에 출연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 점은 후세의 개혁적 지도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국민의 호응이 없이는 개혁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전략적 통찰력을 보여준 것이다. 스스로 부유한 집안 출신인 그는 부자들을 비난하는 대신 그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국민 다수의 구매력이 회복되지 못한다면 부자들이 돈을 벌 기회도 줄어든다는 점을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일반 서민들의 입장에서 서민들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책을 강구하고자 노력하는 대통령을 미국인들은 사랑했던 것이다.

"최근의 역사와 간단한 경제학을 살펴봅시다. 여러분과 저, 평범한 남자와 평범한 여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경제학을 말입니다. (Let us look a little at the recent history and the simple economics, the kind of economics that you and I and the average man and woman talk.) 1929년 이전에 이 나라는 건설과 인플레이션의 거대한 사이클을 지났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는 전쟁의 잔해 복구라는 명목으로 이 부문의 사업을 확장하였지만, 사실 그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의 자연스런 평소 성장을 벗어나는 수준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동안에 생산비가 상당히 떨어졌는데도 소비자가 지불해야 할 가격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기간에 기업은 막대한 이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윤은 가격 하락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비자는 망각되었습니다. 이윤의 아주 적은 부분만이 임금상승에 포함되었습니다. 근로자는 망각되었습니다. 적절한 배당금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주주는 망각되었습니다. (중략)

그 후에 경제붕괴가 찾아왔습니다. 여러분도 그 내용을 다 아십니다. 불필요한 공장에 들어간 잉여금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구매력은 고갈되었습니다. 은행은 겁에 질려 대출금을 회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가진 자들은 나누길 두려워했습니다. 신용이 경색되었습니다. 산업이 멈췄습니다. 상업이 쇠퇴하고 실업이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 1932년 7월 2일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두려움은 없다' 중에서)

홍종학 교수
홍종학 교수
개혁하겠다고 해서 당선된 대통령의 취임 2주년을 맞아 여야 대표의 연설이 있었다. 여당의 대표는 분식회계에 대한 집단소송의 유예필요성을 주장하였고, 야당대표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했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의 뜻을 받드는 최고 권위의 국회 연단에서 아무런 부끄럼없이 마치 재벌에게 잘보이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선거가 없는 해라서 그런 것일까? 이 땅의 백성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취임 2주년을 맞은 루즈벨트를 떠올린 까닭이다. 그리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꼬, 어쩔꼬, 이 불쌍한 백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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