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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멀리 뒤편으로 느릿느릿 물결춤을 추고 있는 남한강물입니다. 이 물줄기가 왼쪽으로 굽이쳐 돌면 달천강과 만나기도 합니다. 자연 경관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곳 근처에 앉아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을, 그 때 그 모습을 생각해 보니 가히 어떤 음을 연주해 냈을지 상상하고도 남을 듯 싶었습니다.
탄금대 멀리 뒤편으로 느릿느릿 물결춤을 추고 있는 남한강물입니다. 이 물줄기가 왼쪽으로 굽이쳐 돌면 달천강과 만나기도 합니다. 자연 경관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곳 근처에 앉아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을, 그 때 그 모습을 생각해 보니 가히 어떤 음을 연주해 냈을지 상상하고도 남을 듯 싶었습니다. ⓒ 권성권
그곳 탄금대에 올라가 이곳 저곳 산책로를 따라 둘러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곳이 정말 이름값을 할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훌륭한 사람을 두 명이나 낸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륵과 신립이라는 두 사람이 그들이었습니다. 우륵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가야금을 처음 우리나라에 알려 준 사람입니다. 신라사람이 아닌 게 흠이지만 그래도 가야국 사람으로서 신라에 귀화했으니 어찌 보면 신라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륵비'입니다. 비문에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551) 때 당대의 악성(樂聖)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탄주하면서 음악을 연마하던 곳이다..."
'우륵비'입니다. 비문에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551) 때 당대의 악성(樂聖)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탄주하면서 음악을 연마하던 곳이다..." ⓒ 권성권
그가 어지러운 가야국을 버리고 신라에 왔을 때, 신라 진흥왕은 먹을거리와 잠잘 곳을 그에게 베풀어주었습니다. 또 마음껏 연주할 수 있도록 충주 땅에 살 곳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진흥왕은 그에게 신라 사람 가운데 젊은이 세 사람, 법지(法知), 계고(階古), 만덕(萬德)을 보내 가야금을 전수 받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우륵이 그들과 함께 고운 가야금을 연주(彈奏)하니,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연주 소리를 들었고, 서서히 그곳 둘레에 부락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그곳 이름을 '탄금대'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탄금대는 우륵과 함께 태어난 곳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 싶습니다. 우륵이 없었다면 탄금대라는 이름난 곳도 가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 김훈도 <현의 노래>에서 그 모습들을 더욱 살아있게 그려내려고 무척이나 애썼던 것 같습니다.

"악기는 인간의 몸의 연장(延長)이었으며 꿈의 도구였다. 악기는 스스로 자족한 세계 안에서 꿈꾸는 듯 했으나, 악기는 몸이 지닌 결핍의 보완물로서 불우해보였다. 악기는 그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선조로 넘어오면서 이 탄금대는 가야금을 연주하는 장소가 아니라 치열한 싸움터로 변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 신립(申砬) 장군이 8000명을 이끌고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을 맞서 치열하게 싸운 전적지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왜군들은 총포를 쏘아대며 우리 군을 위협하며 쳐들어 왔습니다. 그 적들을 맞이해 우리 군은 화살과 몸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신립 장군과 군사 8000명은 끝내 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탄금대 언덕 아래에 있는 '열두대'라는 절벽이 묵묵히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신립 장군은 적을 향해 수많은 화살을 쐈던 까닭에 손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장군은 무디어진 손에 감각을 되찾기 위해 그때마다 절벽 아래에 있는 강물에 물을 담갔는데, 그렇게 내려갔다 올라 온 게 무려 열 두 번이나 되었습니다.

신립장군순국묘지입니다. 이곳에서 신립 장군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고, 이 아래 조금만 내려가면 '열두대'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손에 물을 적셨을지, 그리고 패배하여 어떻게 물 속에 몸을 던졌을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역사성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신립장군순국묘지입니다. 이곳에서 신립 장군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고, 이 아래 조금만 내려가면 '열두대'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손에 물을 적셨을지, 그리고 패배하여 어떻게 물 속에 몸을 던졌을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역사성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 권성권
그러나 열두 번에 걸쳐 손에 물을 적시면서까지 손끝 감각을 살려냈지만 결국 그 싸움은 패배로 끝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통을 삭이지 못한 신립 장군은 결국 그 절벽 아래에 있는 강물에 몸을 던지며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그 절벽 이름이 지금까지도 '열두대'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탄금대에는 그렇듯 즐거움과 슬픔이 함께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저 우륵이 풍류를 쫓아 즐겁게 연주했던 가야금 소리만 멋지게 울러 퍼지는 게 아니라 피비린내 나게 싸운 신립 장군과 팔천 군사들의 한 맺힌 절규가 구슬프게 들려오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역사를 지니고 있는 탄금대에 올랐다는 게 나로서는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도 있었습니다. 그건 탄금대 둘레 곳곳에 세워져 있는 많은 인공 조각상들이 그 옛날 정서들을 느끼는 데에 자칫 방해꾼 노릇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어설픈 조각상들이 우륵과 함께 하는 자연정서와 풍류를 가리고 있었고, 순국을 각오하고 배수진을 쳤던 신립 장군과 팔천 용사들의 용감무쌍한 격진지도 그것들로 인해 생각할 수 있는 틈새가 가려지는 듯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오히려 눈이 피로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 소나무와 들풀 그대로, 그리고 느릿느릿 흐르고 있는 강줄기 그대로를 마음껏 바라보고 또 마음껏 옛 생각을 떠올릴 수 있도록 했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정한 옛 역사의 지평은 아무거나 마구 쑤셔 넣고 채워 넣는다고 해서 그 생각이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최소한 갖출 것만 갖춘 채, 꾸밈없는 자연 그대로를 비워 놓는 데서부터 그 역사의 지평은 더 넓어지고 더 깊이 흘러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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