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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겉그림입니다.
책의 겉그림입니다. ⓒ 푸른역사
사실 '문학동선'이란 말은 처음 듣는 것 같은데 그건 다른 말이 아니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도시나 건물 같은 것을 따라서 작품을 다시 읽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물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읽던 예전 방식과는 달리 그 무게 중심을 장소나 건물에 두면서 읽어 나가는 것이다.

그럴 경우 원래 작가가 의도한 목적에서 적잖게 벗어날 수 있다. 소설이나 시를 통해 작가가 나타내고자 했던 부분들이 상당히 뒤틀리거나 어색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등장 인물이나 그 인물이 지닌 성격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작품 자체가 가진 순수성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김정동 교수가 이 일을 꾸준히 해 온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나 있는 건축 분야에 먼저 마음이 쏠린 까닭이고, 더 큰 까닭은 훗날 우리 문학이 세계에 알려질 때를 미리 대비하려는 이유였다. 그건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는 역사적 건물과 장소들을 세계 사람들에게 낱낱이 알려 주고픈 마음에서였다.

이 책은 그래서 이인직의 <귀의 성>과 한설야의 <과도기>를 비롯해 최인훈의 <광장>과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등 해방 전후를 그리는 작품 17편을 다시금 풀어 쓰고 있다. 이는 그 중심 인물과 사건만을 그저 따라 읽듯 읽어 나간 게 아니라 그 작품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과 무대를 따라서 다시 읽어 나간 것들이다. 거기에다 그 옛날 빛 바랜 사진첩들을 곁들여 주고 있으니 그 움직임을 따라가는 맛이 얼마나 쏠쏠할지 마음껏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제물포(祭物浦)는 1883년 개항했다. 고기도 잡고 농사도 짓는 여느 포구와 다를 것 없는 조그만 어촌이었다. 새우젓 배, 조개젓 배가 들락거리고, 가끔 청나라 정크(舟)가 비단을 싣고 오면 온 동리가 더들썩해지곤 했다. 청일전쟁의 상흔이 그런대로 지워가고 있던 1898년 이른 봄, 포구에 양인(洋人)의 쇠배가 들어왔다."(63쪽)

이는 주요섭(1902∼1979)이 쓴 장편소설 <구름을 잡으려고>를 읽어 나가는 가운데, 주인공으로 등장한 농사꾼 준식이 고향 평양성을 벗어나 큰 꿈을 잡아 보려고 걸어 온 '제물포 항'을 설명해 준 부분이다.

그 부푼 꿈은 철도 공사판에서 시작되는 듯했으나 그 일은 꽉 차서 할 수가 없게 되고, 당시 미국에 가서 일을 하면 부자가 된다는 소문에 혹한 나머지 그는 '개발회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버린다. 하지만 준식은 거기에서 조선인 뽑는 일을 대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일본인인 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어 그는 1902년 12월 22일, 홍승하(洪承河) 목사를 단장으로 하고, 제물포 교회 전도사 안정수(安鼎洙)를 통역으로 한, 102명과 함께 일본 배 '겐카이마루(玄海丸)'에 올라 인천 부두를 떠난다. 그리고 그 배는 열흘을 달려 어느 항인지 모르나 중국인 100여명을 태우고, 또 4∼5일 후에는 일본 요코하마 항에 도착해 일본인 100여명을 더 싣게 된다.

돼지우리와 같고, 감옥과 다를 바 없는 그 배는 4100리를 달려 하와이에 도착하지만 준식은 내리질 못한다. 이어 '싼프란씨스코'를 거치게 되지만, 결국 준식이 내린 곳은 미국이 아닌 멕시코 땅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곳에 내리긴 했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나면서 준식은 도망칠 결심을 하고, 거기에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300백리 길을 걸어 멕시코 국경을 너머 '로싼젤스(羅城)'에 도착하게 된다.

"제물포를 떠난 지 어언 34년이 흘렀다. 준식은 환갑을 몇 해 지나 64년에 이르러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준식은 20세기 초 운명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까지 건너가 남이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겪었다. 살아서 산 한 조각 구름이라도 잡으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공허한 인생이었다."(79쪽)

김승옥(1941.12.23∼)이 쓴 <무진기행(霧津紀行)>도 읽어볼 수 있다. 김 교수는 그 작품 역시 주인공 윤희중이 현실적으로 출세한 인물인데도 내면적 공허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그러한 젊은 날의 번민과 고통을 읽어 내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주인공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선생'과 함께 보낸 시간들을 통해 우울했던 자신의 옛 모습을 들여다보는, 그런 것에도 관심을 두는 게 아니다.

김 교수가 관심 갖는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내면들이 '안개나루'(霧津)라는 것에 한데 어우러져 있는데, 오로지 그곳이 어딘가 하는 것이다. 또한 그 무진과 함께 나타나는 골목, 흙담, 학교 등이 어디인지, 그것을 쫓아가며 그 작품을 읽어나가고 있다.

"서양의 소설가들은 간혹 유토피아를 찾기 위해 '이상도시'를 그려냈다. 그러나 그것은 가볼 수도 살아볼 수도 없는 공상과학의 세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진은 우리 이웃에 있는 도시였다. 비록 만들어진 도시이지만 현실을 반영한 도시였다."(210쪽)

김 교수는 그래서 김승옥이 그려낸 '무진'이라는 도시는 이른바 작가가 살았던 고향 땅 순천으로 보고 있다. 그런 까닭에 김 교수는 1973년 그 책을 하나 들고 순천 시내 곳곳을 구경했다고 한다. 이를 테면 '순천만 갈대밭'이 있는 대대포구도 가보고, 인안동(仁安洞) 방죽길도 걸어보고, 1911년 일제 강점기 때 돌로 지은 매곡동 사립 매산학교(梅山學校)도 둘러보고, 그리고 금곡동에 있는 '순천중앙예배당'도 가 보았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한설야가 쓴 <과도기>는 그 문학동선이 주로 만주 지역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흥 창리∼만주∼함흥 창리∼함흥 구룡리∼장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인훈이 쓴 <광장> 같은 경우는 서울과 평양 그리고 원산을 거쳐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마카오로 향하는 과정까지를 그 무대로 설정하고 있음을 밝혀 주고 있다.

물론 그런 동선을 찾아내는 작업은 그 모두가 김 교수가 밝혀낸 것들이다. 헌데 김 교수가 그토록 힘든 조사를 하면서 좋은 결실을 보고 있지만, 그런데도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 게 있다고 한다.

그건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 무대가 정확하게 기록돼 있지 않는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쯤 저쯤'으로 표현하거나, '어느 도시', 혹은 '집 몇 채'라는 식 등의 표현들. 더욱이 일제 시대 검열을 피하려고 그랬겠지만, 통감부라든지 조선 총독부, 일본군 부대, 경찰서 등을 다룬 소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 일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라면 그 아쉬움이 얼마나 클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다.

그래서 김 교수는 현재 소설가나 시인들이 작품을 쓸 때에는 작품 속 무대를 좀더 확실하고 세밀하게 그려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래야만 훗날 세대들이 이전의 역사를 재현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현역 소설가들이 작품을 슬 때 장소와 건물을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먼 훗날의 독자들 중에도 나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그 때는 그만큼 사료 가치가 큰 작업도 없을 것이다. 문학 속 무대는 우리가 사는 장소에 기억 하나를 추가해 줄뿐만 아니라, 후대가 살아보지 못했던 역사를 재현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314쪽)

문학 속 우리 도시 기행 2 - 김정동 교수의 문학동선

김정동 지음, 푸른역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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