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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음식이 따뜻할 때가 더 맛 있지만 찐빵은 더 그렇다. 막 솥에서 나온 따끈한 안흥 찐방, 입안에 넣으면 그대로 슬슬 녹는다
ⓒ 박도
따끈한 안흥찐빵이 그립다

안흥을 떠난 지 사흘밖에 안 되었지만 벌써 안흥 집이 그립다. 하지만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가 해결돼야 그곳에 갈 수 있다. 내 다리의 깁스를 풀든지, 아니면 안흥 집에 수돗물이 시원스레 나와야 한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다.

독립문 옆 세란병원 정형외과 의사는 4~6 주 지나야 깁스를 풀 수 있다고 했고, 앞집 노씨는 안흥 산골에 언 땅이 죄다 녹아 얼었던 수도관이 뻥 뚫리려면 몇 주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사람의 정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그 새 서울이 서먹서먹하다.

▲ 안흥면 종합복지회관, 이곳에 목욕탕이 있다. 장날(3일, 8일)에만 문을 연다
ⓒ 박도
안흥 산골생활 가운데 즐거움의 하나는 닷새 만에 돌아오는 장날에 맞춰 안흥면 종합복지관 목욕탕에 가는 일이다. 2천원을 내고 탕에 들어간 뒤 샤워를 하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가 나오면 20분이면 족하다. 아내와 같이 갈 때는 내가 먼저 나오기 일쑤인데 그럴 때는 장 구경을 한바퀴하고 나면 시간이 맞는다.

대체로 혼자 가는 경우가 많은데, 탕을 나온 뒤 장을 한바퀴 돌면서 튀김이나 어묵을 사 먹거나 면사무소 앞 안흥찐빵 집에 들러 솥에서 금방 나온 찐빵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먹는데 그 맛이 아주 기가 막히다.

아내가 집에 있으면 2천원 어치(7개)를 사서 3개를 남기고, 혼자일 경우는 천원 어치(3개)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다 먹어치운다. 늙으면 어린이가 된다더니 나도 꼭 초등학생마냥 군것질을 잘 한다.

서울을 떠난 뒤 사람들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안흥찐빵마을'이라고 답하면 금세 안다. 최근 몇 년 새 안흥찐빵은 '국민의 찐빵'으로 사랑받고 있다. 지금은 미국과 캐나다까지 수출된다고 한다.

지난 해 내가 안흥찐빵 축제 기사를 올렸더니, 미주동포까지 슈퍼에 가서 안흥찐빵을 사 먹어야겠다고 댓글을 다는 걸로 봐서 이제 안흥찐빵은 국제적인 브랜드가 된 모양이다.

안흥 우리 집을 찾은 친지들이나 신세진 이에게 가는 길에 찐빵 한 상자를 선물로 들려주거나 택배로 보내면 찐빵 맛이 기가 막히고, 본 고장 맛은 확실히 다르다고 인사를 빵값보다 더 받았다.

일년 가까이 안흥찐빵 집을 곁에서 지켜봤더니, 그 맛의 비결은 밀가루 반죽과 팥소 그리고 빵을 만든 뒤 솥에다 찌기 전에 한 두 시간 숙성시키는데 있었다.

▲ 면사무소에 걸린 '안흥찐빵은 국민의 찐빵'이라는 플래카드
ⓒ 박도
명품의 맛 비법은 며느리에게도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는데, 내 어찌 더 이상의 비법을 천기 누설할 수 있으랴. 이곳 사람들은 이 지방에서 나는 팥과 이 고장여인들의 손맛이라고 한결같이 자랑한다.

찐빵에 얽힌 추억

안흥으로 내려간 뒤 6개월이 지날 무렵, 강원 지역 민방(GTB)에서 나를 초대해 주었다. 아침 시간 생방송이었는데 사전에 작가와 시나리오를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내 경우는 미리 각본을 만들면 오히려 떠듬거리기 때문이다. 방송진행자가 나에게 왜 하필이면 안흥으로 내려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불쑥 안흥찐빵 때문에 내려왔다는,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하고는, 지난날 한 때 내가 찐빵을 만들어 팔았다는, 쓸데없는 말까지 해버렸다. 방송이 끝난 뒤 아내는 '인연 따라 왔다'고 고상한 말로 답하지 뜬금없는 말을 했다고 충고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어찌하랴.

지난날 열차에서 사과장수를 하던 아가씨가 전력을 숨기고 결혼하였으나 밤중에 잠꼬대로 "사과 사이소"라고 하는 바람에 들통이 났다고 한다. 사람의 전력은 무의식중에 드러나는가 보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늘 그러셨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다보면 별 일을 다 하는데 "도둑질, 화냥질, 빈둥빈둥 빌어먹는 짓 외에는 부끄러울 게 없다"고 했다. 오랜 체험에서 우러난 말로 삶의 지혜가 담긴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1961년 가을, 나는 조선일보 계동 배달원 왕눈이의 보조생활을 했다. 나는 지금도 그의 본명을 모른다. 그는 우리 배달원 사이에는 이름 대신 '왕눈이'로 통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기관차'였다. 그는 별명처럼 눈도 유별나게 크고 기관차처럼 힘도 억세게 좋았다. 이른 새벽 보급소에서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나서면 끝집까지 거의 쉬지 않고 뛰었다.
배달 첫 집은 계동 들머리 계산약국(지금의 현대사옥 왼편 대로변)으로 거기서부터 신문을 넣으면서 휘문 대동 중앙학교를 거쳐, 원서동 고개를 넘어 다시 내려와서 창덕궁 사무소에 넣으면 끝이었다.

▲ 면사무소 앞 찐빵집. 안흥찐빵 집은 20여 곳으로 그 맛은 거의 비슷하지만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 조금은 다르다.
ⓒ 박도
그때는 조석간제로 석간 배달 때면 중앙학교 못 미쳐 오른편에 우물터가 있었는데, 약간의 빈터와 남의 집 처마를 이용한 찐빵가게가 있었다.

찐빵가게 주인은 20대 청년으로 신문도 정기 구독했고, 손님이 없을 때는 소설책도 펼쳐보는 찐빵 가게 주인치고는 별난 분으로 고향이 경북 상주인 김무웅씨였다.

왕눈이는 석간 배달 중, 그 찐빵 가게를 지날 때면 한꺼번에 열 개나 후딱 먹어치웠다. 신문 값은 빵으로 셈했는데, 매달 신문대금보다 빵을 더 많이 먹었다. 왕눈이는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인정이 많았다. 내가 찐빵을 몇 개나 먹든 상관치 않고 자기가 값을 치렀다.

내가 왕눈이에게 신문배달을 정식으로 인계받은 뒤에도 신문이 남아서 그대로 넣었다. 매일 무웅씨와 마주치다 보니 잠깐 새 서로 정이 깊이 들었다. 무웅씨는 내가 돈이 없어서 재학 도중에 휴학한 것을 몹시 아파했다.

나는 왕눈이와 달리 빵은 먹고 싶지만 한 푼이라도 아낄 양 절제를 했는데, 무웅씨는 그런 낌새를 알고 몇 개씩 거저 주기도 했다. 그때의 그 찐빵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가난한 날의 행복

어느 날 무웅씨는 자기는 역마살이 있어서 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니 못 견디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전에는 엿장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양은그릇 장사를 시작하겠다면서 찐빵가게를 나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전하자, 어머니는 마침 낙원동 삯바느질 집 일감이 시원찮던 중이라 솔깃해 하셨다.

하지만 가게를 물려받을 돈이 없어서 주저했더니, 며칠 뒤에는 무웅씨가 그냥 하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염치없이 어머니와 나는 무웅씨에게 찐빵 반죽에서 만드는 법까지 강습을 받고는 곧 시작했다.

▲ 안흥 장터 마을에 있는 '안흥성도' 표지석
ⓒ 박도
조간 신문배달이 끝나면 가게를 열었다. 어머니가 주로 찐빵을 만들면 내가 팔았다. 그러다가 석간배달시간이면 보급소로 가고, 매일 밤에는 모자가 그날 번 돈을 계산하면서 학교에 복학할 등록금을 저축했다.

서너 달 찐빵 장사를 하다가 어머니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시고, 나도 이듬해 3월부터 학교에 복학하게 되어 더 이상 찐빵가게를 할 수 없던 터에 무웅씨가 찾아와서 다시 가게를 돌려주었다.

이미 40년이 훨씬 지난 옛날이 되어 버렸다. 그때는 한꺼번에 찐빵을 10개 먹을 정도로 식욕이 왕성했다. 그때의 습성인지 여태 찐빵을 좋아하고 그것도 인연인지 늘그막에 찐빵마을에서 살게 되었다.

그때의 김무웅씨는 그 뒤 전혀 소식을 모른다. 그분은 노래도 잘 부르고 역사고 문학이고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박학다식한 낙천가요 역마 꾼이었다.

이 글 보고 혹 그분이 쪽지로 연락주시면 깁스한 발로라도 목다리를 짚고 절뚝절뚝 달려가겠다. 가난했지만 인정만은 따뜻했던 아 옛날이여!

덧붙이는 글 | 필자의 사정으로 당분간 서울에서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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