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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인생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생겨난 말도 많다. “침 뱉은 우물 다시 먹는다” “대문 밖이 저승이다” …….

안흥으로 내려가서 일년 가까이 잘 지내다가 산비탈에서 골절을 당했다. 그 바람에 졸지에 목다리를 짚는 환자로, 더 이상 산골에 지내기가 불편해서 깁스를 풀 때까지 아내의 의견을 좇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한 달 남짓 후에 다시 안흥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꼭 필요한 최소한의 짐만 꾸려서 카사(고양이)와 함께 아내의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아내는 고속도로 통행료를 아낀다고 늘 국도로 다녔는데, 오늘만은 고속도로를 탔다. 국도 응달진 곳에는 아직도 빙판길이라 위험하다고 했다.

그런데 안흥을 떠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내가 앞으로는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를 쓸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점을 아쉽다고 푸념하자 내 글에서 사실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야단법석인 아내가 맞장구를 쳤다. 서울에서 안흥 산골 이야기를 써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 딴 글쓰기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내 글을 기다려주는 골수 네티즌들의 성원에 보답하고자 이제까지 한 번도 글로 쓰지 않았던 추억의 인물을 찾아서 이 참에 그 이야기를 이따금 띄울까 한다. 언젠가 안흥 산골에서 쓰려고 미뤄뒀던 글감이었다.

선생님,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몇 해 전 오월 어느 날 퇴근시간 무렵 그가 불쑥 학교로 찾아왔다.
“선생님, 저 기억하시겠습니까? 저 현수예요.”
“안현수?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걸.”
“예, 맞습니다. 30년 전 제자의 이름과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는 군요. 여태 기억해 주시는 데 늦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사실 저에게는 선생님이 몇 분 안 되거든요.”
“무슨 말씀, 자네를 보니 내가 오히려 볼 낯이 없네.”

1972년 서울 오산중학교 1학년 12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눈동자가 머루처럼 까맣고 축구를 아주 잘 했다. 그때 우리 반 악동들은 유난히 축구를 잘 했다. 그래서 신입생 환영 축구대회에서 12반 중 챔피언으로 등극하여 다른 반 아이들의 부러움을 한껏 샀다.

나는 그해 첫 학급담임을 맡았는데, 가장 괴로웠던 것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등록금을 독촉하는 일이었다. 그때 그 학교의 학구는 용산구 이태원 일대로, 이른바 해방촌 아이들이나 미군부대 군속 아이, 심지어 양색시의 혼혈아까지 있었다. 그 시절에는 가난한 집이 많아서 제 날짜에 납부금을 내는 아이는 절반도 안 되었다.

매일 아침 직원조회 시간 끄트머리에는 교감선생님이 모눈종이에 그린 막대그래프를 쳐들고 학급별 납부상황을 공개하면서 학생들의 등록상황을 채근했다.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이라 그렇게 채근하지 않으면 재정이 빈약한 사립학교는 운영이 어려우니까 어쩔 수 없는 방책이었겠지만 대부분 선생님들은 그 점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학년 말 진급사정회 날 세 학생의 자리가 온종일 비어 있었다. 나는 그날 밤을 새우다시피 가슴 아파하면서 ‘우울한 날’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리고 그때 정기 구독했던 <독서신문>에 보냈다. 열흘 후 독서신문에 ‘비어 있는 자리’라는 제목으로 글이 나갔다.

비어 있는 자리

군복무를 마치고 곧장 교직에 몸담은 지 1년여, 지난 3월 눈동자가 유난히도 초롱초롱한 중학교 신입생들을 학급담임으로 맡았다. 입학 무렵에는 아직 젖내가 가시지 않은 개구쟁이들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의젓한 중학생으로 성장함을 볼 때마다 교육의 보람을 느끼곤 했다.

오늘은 지난 학년도를 마무리하는 진급사정회 날이다. 학년 말까지 한 명의 낙오자 없이 70면 전원을 이끌고 왔는데, 아침 조회시간에 교실로 가니 빈 자리가 세 곳 생겼다.

“등록금을 내지 않았으므로 학교에 오지 말라”는 말은 차마 전하지 못하고 ‘등교정지’를 당하고도 그동안 계속 출석을 시켰지만 어제는 어쩔 수 없었다.

▲ 나의 첫 산문집 <비어 있는 자리> 표지
ⓒ 박도
“내일은 학년 말 진급사정회 날이니 내일까지는 꼭 납부해야 한다”는 말을 얼더듬으면서 전했더니 그들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눈물을 글썽이며 귀가했다.

이렇게 한꺼번에 세 자리가 빈 날은 처음이고 어제 눈물을 글썽이며 풀이 죽어 돌아가던 녀석들의 얼굴이 떠올라 온종일 마음이 시큰했다.

‘가난이 죄’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나 자신 몸소 체험하기도 했지만 채 피지도 못한 그들에게 그 말을 어떻게 일러줄까? 나도 학창시절 등록금 독촉으로 무척 시달렸는데 그때 등록금을 독촉하던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왜 그토록 매정스럽고 무섭게 보였던가!

어제까지 개근했던 세 녀석은 오늘은 등교도 못한 채 어쩌면 세상을, 부모님을, 담임선생을 원망하고 있을 게다. 오늘따라 ‘선생님’이라는 존칭이 거추장스럽고 교단에 선 게 후회스러워 어디 가서 한바탕 통곡이라도 하고 싶다.

영호, 화영, 현수 - 너희들이 등교하는 날, 내 우울한 마음은 활짝 개이리라.
-<독서신문> 1973. 3. 5.


유학생이 모아서 보내준 장학금

이 글이 나간 뒤 한 달 남짓한 동안에 100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수녀님, 스님, 유학생, 대학 때 여자친구 … 그 가운데 미국 버클리대학의 유학생 최성찬씨는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이 주일 예배에 광고하여 모았다면서 100불을 교장선생님 앞으로 보내주었다(내가 돕지 못한 걸 유학생에게 신세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거절하였기에).

그 돈으로 두 학생의 한 기분 장학금을 주었다. 그때는 가난한 학생이 너무 많았고, 세 학생 등록금으로 모자라서 성적이 우수하고 가난한 학생에게 주었다.

그때 독서신문 편집자가 뽑은 ‘비어 있는 자리’라는 글 제목은 나의 첫 작품집 제목이 되었다. 책을 펴낼 때 60여 꼭지의 글 가운데 출판사 편집진도 그 제목을 뽑았다. 1980년대 말 그 책은 꽤 팔렸다.

30년만에 나타난 그는 <폭풍의 언덕>의 히스크리프처럼 아주 당당하고 귀티가 흘렀다. 그는 굳이 저녁을 사겠다면서 나를 태우고는 교외로 차머리를 돌렸다.

그는 중2를 최종 학력으로 중퇴하고 곧장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문구점 사무기기 기술자로 출발하여 26세에 오너로 독립, 지금은 시청 앞 새서울 지하상가에서 사무용품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묵직한 아픔

독학으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였으나 먹고사는 게 바빠서 대학은 진학치 못하였다고 했다. 어릴 때는 학력이 낮은 걸 많이 아파했지만 이제는 모두 극복하였다면서, 자기에게는 내가 몇 안 되는 선생님이기에, 뒤늦게라도 밥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때를 생각하니 내 처사가 잘못됨을 마음속으로 깊이 후회하면서도 차마 그에게 솔직히 참회의 말은 하지 못하고 ‘면목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대체로 선생님들은 장학금 지급에 공부 잘하는 학생 순서로 혜택을 주는 데 익숙해 있다. 그때 유학생이 보내준 장학금은 세 학생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게 옳은 처사였다.

그는 갈비를 푸짐하게 사고는 굳이 자기 승용차로 내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내가 차 한 잔 들고 가라는 데도 예고 없이 사모님에게 결례할 수 없다면서 곧장 차를 돌리고는 선물꾸러미를 한 상자 안기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학벌이 없었기에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았을 거예요.”

30년 전에는 등록금을 못내 눈물 글썽이던 학생이 오늘은 중소기업의 대표로 활짝 웃는 모습이라서 보기에 좋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지난날 내가 스승답지 못했다는 묵직한 아픔이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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