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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3일, 친한 고향 친구 한명과 베이징과 순이(順義)를 연결하는 징순루(京順路)에서 청더(承德, 옛 이름은 열하(熱河)로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무대가 되었던 곳)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춘지에(春節, 중국의 설)를 맞이하여 귀향하는 사람들과 선물 꾸러미로 미니버스에는 거의 빈 자리가 없다. 기사에게 “쓰마타이창청(司馬臺長城)!” 했더니 “30콰이(한화 4천원 정도)!” 한다.

자리에 앉아 좀 가다 보니 군데군데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 오르고 차 안은 금방 뿌연 연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없다. 차 안에 붙은 '담배를 피우지 마세요(請勿吸煙)'라는 문구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베이징 시내에서는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승객이 거의 사라졌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벗어나면 이렇게 담배들을 피워 대고 승객들도 이를 아무렇지 않게 묵인해 준다.

개구멍으로 천하의 쓰마타이장성을 오르다

▲ 구베이커우 못미처 오른편으로 보이는 쓰마타이장성의 패방이다.
ⓒ 김대오
1시간 30분쯤 달려 차창 오른편으로 커다란 패방에 '쓰마타이'라고 쓰여진 곳에 차를 세워 내렸다. 그러나 그곳에서 쓰마타이장성까지는 꽤나 멀어 보여 지나가는 미엔빠오처(面包車, 미니 봉고차)에 손을 내밀었더니 마침 쓰마타이까지 운행하는 차량이었다. 차비는 5위엔.

쓰마타이장성 매표소 앞에 도착해 내리려고 했는데 그 운전기사가 갑자기 엉뚱한 제안을 한다. 자기가 입장권을 끊지 않고 장성을 오를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 15위엔만 달라는 것이다. 좋다고 했더니 그는 우리를 두꺼운 얼음이 언 호수가에 내려 주며 건너가라고 한다. 쓰마타이장성 앞에 원앙호(鴛鴦湖)가 있는데 추운 날씨에 그곳이 얼어 건널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얼음이 깨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금이 간 사이로 두께를 보니 족히 1m는 되어 보였다.

공짜로 얻어 먹는 밥이 더 맛있다고 했던가. 이렇게 개구멍으로 살짝 틈입하여 오르기 시작한 쓰마타이장성은 일찍이 중국의 한 사상가가 '장성 중의 천하 으뜸'이라고 평한 바대로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 성벽과 봉화대의 일부는 붕괴되고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 산정에서 온갖 풍화를 겪어낸 세월을 느끼게 한다.
ⓒ 김대오
굳이 장성을 쌓지 않아도 넘기 힘든 험준한 산정에 쌓여 있는 자태하며 역사와 고풍스런 멋을 자아내면서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모양…. 무엇보다 아래로 흐르는 물과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어우러지는 풍채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우리가 장성을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 끈덕지게 우리를 따라오며 가이드해 주던 할머니가 있었는데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며 장성 책자와 엽서를 사라고 하소연한다. 사연을 들어본 즉 쓰마타이 근처에 사는 농민인데 겨울에는 일이 없고 병든 남편을 간병해야 하기에 도시로 일하러 갈 수도 없어 이렇게 책자와 엽서를 판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우리를 따라 오른 거리가 족히 쓰마타이장성의 절반은 되었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측은한 마음도 들어 얼마냐고 했더니 책은 100위엔, 엽서는 30위엔이라고 한다. 터무니없이 비싼 값이었으나 책자는 이미 있으니 엽서나 하나 달라고 해서 샀더니 고맙다고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 관광객들에게 책자와 엽서를 파는 쓰마타이의 또 다른 가이드 할머니.
ⓒ 김대오
할머니의 소개에 따르면 쓰마타이 장성은 명나라 만력제 5년(1577년)에 축조되었으며 모두 17개의 봉화대가 있고 중일전쟁 때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어 많이 파손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진산링(金山崚) 장성과 구베이커우(古北口) 장성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 8시간 정도 걸린다고 알려 준다.

장성을 오르는데 정말 성벽 곳곳에 ‘만력 5년’ 문귀가 음각된 벽돌이 많았다. 명13릉 중에서 정릉(定陵)으로 알려진 자신의 지하 궁전을 만들어 놓고 여름에도 시원하게 후궁들과 유희를 즐겼던 황제가 바로 만력제 아닌가. 그 즈음에 민초들은 상상도 못할 이 험준한 높이에 돌을 짊어지고 올라 목숨을 걸고 이 장성을 쌓았단 말인가.

▲ 쓰마타이에서 바라보는 진산릉장성의 모습이다.
ⓒ 김대오
제일 높아 보이는 망루까지만 보고 방향을 돌려 진산링장성으로 돌아가리라고 마음을 먹었는데 망루에 올라 보면 또 다른 봉우리가 이어지고 오르면 또 다른 망루가 나타나며 우리를 유혹했다. 절벽 끝에 서식하는 아름다움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장성의 절경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어서 차마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쓰마타이를 찾은 관광객들이 모두 서양인이라는 점도 특이한데 산이 주는 열린 마음과 너그러움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니하오, 하이”가 절로 나온다.

쓰마타이 장성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한참 장성의 전율에 도취되어 더 멀리 있는 절경을 찾아 나서는 우리의 발걸음을 뚝 막아 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이곳은 미개발 지역으로 위험하니 관광객의 출입을 금함'이라는 표지판이다. 그리고 이를 어길 경우 200위엔의 벌금형에 처한다는 내용까지 더해져 있으니 여기서 걸음을 돌릴 수밖에! 그래도 바로 앞 능선까지만 가 볼까 하고 걸음을 내딛던 내 친구. 성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 보니 웬 경비원 복장을 한 사내가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지도 않고 비스듬히 누운 채로 “위험하니 돌아가시오” 한다.

▲ 쓰마타이장성의 꼭대기, 자기만의 방(?)에 비스듬하게 누워 자신의 일상을 소개하는 친동밍형과 눈높이를 맞추어 보았다.
ⓒ 김대오
“가장 오래된 장성은 풍화에 사라지고 남은 장성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또 이렇게 길이 막히는구나”하며 일부러 너스레를 떨자 그가 “바람이 없고 날씨가 좋으면 얼마간 허락을 해 줄 수도 있지만 오늘은 바람이 심해서 안되겠다”며 말을 걸어온다. 돈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여 그에게 몇 마디 말을 걸어 보았더니 그는 의외로 수도자처럼 맑고 품격 있는 언행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가 들려 주는 그의 일상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이었으며 장성에 대한 소개 또한 그야말로 징차이(精彩, 뛰어난)한 것이었다. 쓰마타이의 파수군, 그의 이름은 '친동밍(秦東明)'이었다. 장성을 연결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과 같은 성씨라며 웃어 보이는 그는 1969년생으로 미윈(密雲) 인근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군대에 입대하여 5년간 군 생활을 하고 군에서 배정해 준 직장을 다니다가 작년 여름부터 쓰마타이장성에서 이 일을 해 오고 있다.

아침 7시에 무전기와 찻병 하나 들고 쓰마타이에 올라 9시부터 이곳에서 관광객을 관리하다가 오후 3시 반쯤에 산을 내려가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매일 그렇게 장성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산을 보고 자연을 느끼는 것이 너무 좋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 딸과 6개월 된 둘째 아들이 있는데(중국은 원래 한 아이만을 낳을 수 있는데 산간 오지 출신에게는 둘째 아이가 허용된다) 월급이 400위엔(5만 2천원 정도)에 불과해 걱정이라고 하였다.

▲ 쓰마타이의 최고봉인 독수리처럼 생긴 산과 등반로 중간에 있는 독수리 모양을 한 바위의 모습이다.
ⓒ 김대오
오늘은 더 이상 관광객이 없을 것 같다며 함께 내려가자던 친동밍은 출입 금지 표지판 너머 산마루로 우리를 안내해 쓰마타이의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톈띠(天梯)와 톈치아오(天橋)에 갔을 때의 경험담을 들려 준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산이 독수리가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소개해 주는데 정말 부리의 모양이며 영락 없는 독수리의 형상이다.

그리고 이 쓰마타이에는 험준한 산정의 장성을 쌓다가 희생된 민중의 넋들이 여러 동물 형상의 기암괴석으로 솟아 있다며 하산 길에 거북이, 코끼리, 악어, 메뚜기바위 등을 소개해 주었다.

다음 번에는 형이라고 부를게요

▲ 위는 코끼리 형상, 아래는 거북 형상의 바위이다. 멋진 기암괴석을 구경하는 것이 쓰마타이장성의 또 다른 재미이다.
ⓒ 김대오
우리가 올랐으나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그는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되짚어 주었다. 이미 쓰마타이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던 우리들은 그가 매일 오르내리면서 확인한 진귀한 문양의 벽돌과 지형에 알맞게 변형된 특이한 건축 양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내려가는 길에 장성을 혼자 오르는 서양 여자가 있어서 저 여자가 출입 금지 표지판 너머로 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친동밍은 시간도 늦고 멀리 보이는 미니버스를 가리키며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금방 내려올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손바닥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여 개구멍으로 들어온 우리를 뜨끔하게 했다.

▲ 쓰마타이장성 위에서 내려다 본 원앙호의 모습이다. 온천이 나오는 위 호수는 얼지 않았고 아래 호수는 두껍게 얼어 있다.
ⓒ 김대오
아침과 점심을 먹지 못해 배가 고프다고 하자 그는 장성 옆 산에 있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형제가 운영하는 식당에는 한 무리의 서양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극구 마다하는 그를 청해 함께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원앙호 상류에 있는 온천과 광천수 물로 만든 요리들은 우리의 시장기와 더해져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우리가 불법으로 건넌 그 원앙호를 건너며 그는 온천수가 나오는 위의 호수는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으며 아래의 인공호수만 얼게 된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얼음이 얼며 기포가 만들어 낸 얼음 속의 매화꽃이며 호수 주변의 횃불나무 등 범인들에게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얘기들을 해 준다.

▲ 원앙호의 얼음 속에 피어 있는 매화꽃이다. 이는 수도자의 맑은 눈에만 보이는 또 다른 세계일 것이다.
ⓒ 김대오
헤어져야 하는 지점에 도착해서 그는 문득 품 안에서 무언인가를 꺼내더니 “가진 것이 이것뿐이네”하며 우리에게 건넨다. 검은 옥으로 된 묵주이다. 그의 손때와 외로움이 묻은 그것을 받는데 왠지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에 사양했더니 다음에 또 놀러 오라며 기어코 내 손에 묵주를 안겨 주었다. 그는 눈이 내린 다음 날에 오는 것이 가장 멋지다며 자기가 눈을 깨끗이 쓸어 놓고 기다리겠다고 악수를 건넨다. 그 깊고 세심한 마음에 대한 답례를 찾다가 나는 다음에 오면 ‘형’이라고 부르겠다는 말만 남기고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 쓰마타이장성 비석 앞에서 작별을 나누다.
ⓒ 김대오
쓰마타이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춘지에(春節)에도 가족이 있는 집에 가지 못하고 장성을 지켜야 하는 친 '형'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올해가 번밍니엔(本命年, 자기의 띠와 같은 해. 중국인들은 번밍니엔에 오는 액운을 막기 위해 붉은 색 속옷이나 양말, 허리띠를 착용한다)인 친 형은 섣달 그믐날 밤에 붉은 색 속옷을 입는다고 했는데 다시 갈 날에 한벌 장만해 가리라. 그리고 눈이 올 때마다 그 긴 쓰마타이장성의 계단의 눈을 쓸고 있을 친 형에게 안부 전화라도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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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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