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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많은 광화문 현판, 일제 때 사진 디지털 복원

문화재청이 한국전쟁 당시 유실된 광화문 현판 글씨를 디지털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문화재청은 15일 '한국의 집'에서 브리핑을 갖고 "1916년 촬영한 광화문 사진의 유리 원판을 디지털 분석한 결과, 당시 현판을 70% 가량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며 복원된 한자 글씨를 공개했다. 문화재청이 현판의 원래 글씨를 복원할 경우 광화문 현판 교체를 둘러싼 논란도 상당 부분 불식 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브리핑장에서 디지털 복원을 밝히는 유홍준 문화재청장
ⓒ 황평우
그동안 문화재청은 광화문 편액을 정조대왕의 글씨를 집자하거나 추사 김정희나 한석봉 등 당대 최고의 문필가의 글씨 집자하는 방법, 현존 서예가에게 쓰게 하는 방법을 고려 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본 기자는 지난 1월 말부터 여려 경로를 통해 광화문 편액의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책으로 엮여진 광화문 사진을 모두 살피기도 했으며, 대구에 있는 사진 수집가를 찾아가 사진을 살피기도 했다. 또 1920년대 <매일신문>을 틈틈이 살피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일제가 촬영한 유리 원판 사진에는 혹시나 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지난 2월 1일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하지만 유리 원판은 보여줄 수 없다는 박물관 직원의 설명과 디지털 색분해 작업을 하고 있으니 곧 공개하겠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번에 문화재청이 디지털 복원한 유리 원판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3만8천여장의 흑백 유리 원판으로, 조선 총독부가 1909년부터 1946년까지 우리 나라 전역과 중국 요녕성, 길림성 일대의 유적, 유물, 발굴, 민속, 자연, 환경 등을 촬영한 것이다. 총 13만8천여장이었는데 그중 십만장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4만여장만이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유리 원판 자료의 중요성을 감안해 1916년부터 소장유물(보관품 3151-3358)로 등재해 별도 보관해 왔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가 유리 원판을 관리하고 있다.

▲ 1916년에 촬영된 광화문의 유리 원판 사진(사진 제공: 문화재청)
유리 원판은 등록된 원판과 미등록된 원판으로 나뉜다. 미등록 원판은 일제가 패망해 급하게 철수한 때문인지 촬영 기록이 따로 남아 있지 않다. 등록된 유리 원판은 각각의 고유번호가 부여되어 있으며 별도의 유물카드가 상세히 작성되어 있다. 유리 원판의 고유번호는 촬영한 날짜 순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1911년 촬영한 102번째 원판일 경우에는 '110102'이라는 번호를 부여 받았다.

유리 원판의 규격은 대판 1종, 중판 2종, 소판 2종의 총 5종과 이외에도 소량의 소판 플라스틱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1997년 유리 원판 목록집(내부 자료분류- 비공개)을 제작하긴 했지만 아직 3만8000여장의 유리 원판 사진에 대한 분류와 내용 파악이 완벽하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지난 2004년 4월 문화재청은 3만8천여장의 유리 원판 중 '궁·능 관련 유리 원판'만 따로 모아서 도록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이 도록에는 광화문의 편액 틀이 보이는 사진이 한장 있는데 그 사진이 이번에 문화재청에서 디지털로 복원하는 데 재료가 된 원본이다.

이 도록집에는 광화문과 경회루, 근정전 등의 주요 건물 편액과 처마밑의 목재 결구(짜맞추기)와 단청 모습을 근접 촬영한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 하지만 유독 광화문 편액만은 근접 촬영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 일제는 경복궁의 경회루, 근정전 등 주요 건물에 대한 근접촬영을 했으나 유독 광화문 편액만 보이지 않는다(사진 제공: 문화재청)
유홍준 청장은 브리핑에서 "조선고적도보 및 일본 동경대학교 소장 사진자료(유리 원판) 확인 및 디지털 분석을 추진한 후 제일 뚜렷한 글씨로 원형 복원을 검토할 것"이며 "편액 글자체(선정된 집자) 및 교체 시기 등에 관해 문화재위원회를 거쳐 세부사항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 청장은 이어 문화재위원회 심의 결과 긍정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상징성을 고려,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오는 8·15일 교체하는 원칙은 변함없다"고 밝혔다. 유 청장은 또 "기존 박정희의 한글 편액은 따로 보관할 것"이라고 밝혀 일부에서 한글 편액을 그대로 두자는 주장에 쐐기를 박았다.

광화문의 편액 글씨를 디지털로 복원한 것은 반가운 일이나 문화재청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이 경솔하게 '정조'니 '집자'니 발표한 것에 대해서는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국내에 남아 있는 유리원판 도록에 대한 자료 정리 또한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하며, 일본 동경대학에 있는 유리원판 자료의 공동연구에도 집중해야 할 것이다.

편액 논란 광화문, 앞으로 어떻게 되나
2009년까지 제자리 찾기 등 복원 작업

광화문은 태조 4년(1395) 창건했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시 전소했다. 고종 2년(1865)에 중건했으나, 일제의 조선총독부청사 신축에 따라 1927년 광화문을 해체해 건춘문 북쪽(현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으로 이건했다. 1950년 한국전쟁시 피폭으로 문루가 소실되고 육축만 남게 되었으며 1968년 2월 현재 위치에 철근 콘크리트조로 재건했다.

현 광화문은 원래 위치에서 북측으로 14.5m 후퇴, 동쪽으로 10.9m 이전 및 중심축에서 약 5.6도 동측 방향을 정면으로 하여 건립한 것이다. 편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휘호(한글)한 현판을 부착했다.

문화재청은 일제 강점기에 변형, 훼손된 조선 정궁인 경복궁을 원형대로 복원 정비하기 위하여 90년부터 2009년까지 20개년 계획을 세워 5단계로 추진하고 있다. 그 중 제5단계가 광화문 및 기타권역 복원사업인데 광화문 원 위치 복원과 현판 교체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후 문화재청은 '경복궁복원정비기본계획(1995)'을 수립하고 2003년 경복궁 광화문 원위치 복원 관련 공청회 개최하기도 했다.

광화문 편액 교체를 위해 자료와 사진을 공모하기도 했지만 관련자료를 찾지 못하다가 이번에 디지털 분석을 통해 광화문 현판 옛 사진(유리 원판) 복원 성공에 이르렀다.

<경복궁영건일기>(고종2년(1865) 6월 1일부터 9월 29일까지 경복궁 중건 공사 기록)에는 9월 17일에 당시 경복궁 중건의 훈련대장인 임태영이 현판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번에 판독한 글자도 임태영이 쓴 것으로 보인다. / 황평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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