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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맛있고 행복했던 시절이 다시 올련가? 아이들에게도 소중한 꿈을 물려 줘야 할 텐데...
그 맛있고 행복했던 시절이 다시 올련가? 아이들에게도 소중한 꿈을 물려 줘야 할 텐데... ⓒ 김규환
서울로 돈 벌러 간 형과 누나가 버스를 대절해 내려온다는 편지가 왔다. 어머니는 바쁘다고는 표현하기 힘들도록 부산했다. 밤낮으로 길쌈, 땔나무, 조리를 절고 잠깐잠깐 짬이 나면 명절을 쇠기 위해 짬을 내서 한 가지씩 해치웠다.

시루에 짚 다발을 태워 재가 사그라지면 불려 놓은 콩 한줌 올리고 재를 놓고 한 켜 한 켜 쌓아간다. 물동이에 물을 길어 와서 몇 번 끼얹어 주고 잿물이 빠지면 윗목에 나무 삼발이를 걸쳐 날마다 두 번씩 밖으로 가지고 나가 또 물을 끼얹어 주었다. 이틀이 지나자 배가 서서히 불러온다. 콩나물이 눈을 떠사흘 째 쏙쏙 머리를 내밀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에 사람이 덩캐덩캐 모여 살았답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에 사람이 덩캐덩캐 모여 살았답니다. ⓒ 김규환
섣달 대목장이 서던 다음날 찹쌀 불려서 가루를 내고 쪄서 절구에 넣고 떡메로 계속 쳐댔다. 안반에 홍두깨로 쫙쫙 얇실얇실하게 고루 펴 어른 손바닥만하게 칼로 잘라 윗목 아랫목 가릴 것 없이 방바닥에 깔아 놓았으니 며칠간은 새우잠을 자야 한다.

눈썰미가 있고 분위기 파악을 잘 하던 나는 시키지 않아도 산에 가서 삭정이 두 다발에 싸리나무를 해왔다. 아침부터 꼬실꼬실 딱딱하게 마른 찰떡에 참기름을 발라 재두고 씨나락을 튀겨 껍질을 벗겨 알맹이만 따로 분리해 한과(韓菓) 옷을 입힐 준비를 한다.

햇살이 마루에 비칠 무렵 지푸라기 끝으로 빗자루 하나 만들어 본격 부엌일을 시작했다. 불을 살살 때 솥이 데워지자 어머니는 손에 장갑도 끼지 않은 채 투박한 손으로 기름에서 찹쌀 조각을 꺼내 솥에 넣는다.

잠시 뒤 내 꿈이 부풀듯, 설을 한없이 기다리는 내 마음인 듯 종잇장처럼 얇실하던 찹쌀 조각이 교과서 두께로 팽창하고 넓이는 공책만큼 커졌다. 두 시간여 유과(韓菓)를 구웠다. 조청이 잔불에 달여지는 동안 튀밥을 입혀서 한입 베어 물자 공기층이 두꺼워진 유과가 사르르 녹는다.

70년대 시골 오일장의 풍경. 전남 화순 동복장입니다.
70년대 시골 오일장의 풍경. 전남 화순 동복장입니다. ⓒ 화순군
식혜(食醯)를 만들 때도 아랫목을 내줘야 한다. 어머니 공력을 받은 덕인지 단밥 단술이 너무 달지도 싱겁지도 않게 잘 삭았다. 동동 뜬 밥알을 거르고 물만 한나절 느긋하게 잔불로 달이니 거무튀튀한 조청이 한단지라. 오늘부터 보름 지날 때까지는 내 입 궁금하지 않을 터다.

헌옷과 포대기를 둘러 놓은 술도가지엔 막걸리가 뽀글뽀글 거품을 내뿜으며 방안 공기를 몽롱하게 바꾸고 있다. 드디어 내일은 섣달그믐이다. 큰 아들 일행인 형제자매가 모두 집으로 오는 날이다.

떡하는 날 돼지 멱따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다. 집에선 분대(떡취)와 말린 쑥을 씻어 담가둔 찹쌀과 시루에 함께 넣고 삶기를 두어 시간. 품앗이를 하며 몇 집이 돌아가며 일손을 던다. 확독 주변에 밥알과 이리저리 쑥이 튀어 향긋하다.

명절에 조기(굴비)가 빠질 수 없죠.
명절에 조기(굴비)가 빠질 수 없죠. ⓒ 김규환
물 한 바가지 떠다 놓고 이기고 메로 친다. 섞고 뒤적여 찐득찐득한 한판이 나오면 식기 전에 떡 덩어리를 지듯 어깨에 메고 방으로 들어가 어루만지고 다져서 솥뚜껑으로 돌리고 칼로 잘게 잘라 콩고물을 입힌다. 고소한 인절미와 취떡이 만들어진다.

멥쌀 떡을 쳐서 떡판을 눌러 모양을 내고 참기름을 발라 차곡차곡 석작에 담는다. 가래떡은 방앗간에 맡겨 놓았으니 장에 가신 아버지가 오시던 길에 찾아오셨다. 옆을 떠나지 못한 나는 그날 한번 먹어 보는 몇 가지 떡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조청 발라 말랑말랑하고 차진 떡을 쏘옥 늘려 먹는 재미에 빠졌다. 어머니는 그날 밤 떡가래 써느라 잠을 물렸다.

차례상에 올릴 대목장을 다른 오일장에서 마저 봐오신 아버지는 약주 한잔 하셨는지 불콰한가 보다. 나는 두부 다섯 모를 사오고 나서 쇠죽을 쑤었다. 동네엔 자욱한 연기가 깔려 맛난 설을 맞는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광에서 꺼내온 온갖 나물을 불려 나물 만들고 전어, 준어, 병어, 굴비에 탕감 재료가 놓이고 곶감, 김 한 톳에 홍어 한 마리, 참꼬막 다섯 되가 갖가지 요리로 상에 차려질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산적과 전을 부치느라 지지고 볶는 소리에 온 동네가 향긋하다.

인절미도 맛있고 분대(떡취나물)로 만든 떡은 더 쫄깃하고 향이 간드러지도록 맛있습니다. 살아 있는 밥알 씹는 기분도 무척 좋습니다.
인절미도 맛있고 분대(떡취나물)로 만든 떡은 더 쫄깃하고 향이 간드러지도록 맛있습니다. 살아 있는 밥알 씹는 기분도 무척 좋습니다. ⓒ 김규환
그믐날 밤 마른 생선을 오리고 밤을 깎고 있을 때 서울 간 형제들이 탄 대형 귀성버스 두 대가 좁은 마을 앞에서 부릉부릉 요란하다. 경북능금, 나주배, 밀감 한 상자씩 메고 청주 한 병에, 가방에는 동생들과 어른들 옷가지를 잔뜩 챙긴 신사 숙녀들이 고향의 품에 안겼다.

사온 설빔을 입고 눈썹이 하얗게 셀까봐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밥 한번 더 먹고 정월 초하루를 밝게 맞았다. 서설(瑞雪)이 온 세상을 덮어놓아 유난히 반짝였다.

설에는 눈(雪)이 내려서 녹지 않아야 제맛입니다. 올해도 내려갈 때까지 녹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설에는 눈(雪)이 내려서 녹지 않아야 제맛입니다. 올해도 내려갈 때까지 녹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 김규환
물밀듯이 밀려오는 손님에 치어 살면서도 엎드려서 꼬막깨나 까먹고 떡국을 몇 그릇이나 먹었는지 모른다. 이튿날엔 산 넘고 재 너머 외갓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다. 대보름날까지 배부른 행복에 겨웠다.

덧붙이는 글 | 독자 여러분 설 잘 쇠시고 무사히 올라오시기 바랍니다. 맛있는 것 많이 드시고 건강하게 뵙겠습니다.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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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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